영원회귀

by 고석근

영원회귀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가? 그렇게 살아라 지금 당장 여기에서. - 프리드리히 니체



어릴 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일이었다. 밤에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뒷집의 친구 ㅊ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나는 ‘뭐지?’하고 서 있는데, 그는 다짜고짜 내가 그의 집 담벼락에 ㅊ의 욕을 써놓았다며 나를 몰아세웠다.

아니라고 변명을 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헉! 이런 억울한 일이...... .’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는 억울함을 하소연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 누구에게 나의 이 터질 듯한 분노를 호소한단 말인가!


부모님에게 말씀드리면 욕을 ‘담벼락에 욕을 썼다. 안 썼다.’하는 진실공방은 사라지고 문제를 일으킨 내가 문제가 될 것이었다.


나는 꾹 참으며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지냈다. 하지만 반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도 아프게 기억이 나는 걸 보면, 그때의 상처는 너무나 깊었나 보다.


그런데 그때의 수치감, 굴욕감은 그때의 일이 아니었다. 그 뒤에도 계속 똑같이 반복되었다.


무슨 억울한 일이 생기면 당당하게 변호하거나 반항하지 않고, 피해버리는 것이었다. ‘시간이 약이겠지’하는 게 내 삶의 철학이었던 것 같다.


인문학을 공부하며 나를 오랫동안 성찰하였지만, 억울한 일에 맞서지 못하는 행동은 습(習)이 되어 나의 제2의 천성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제 와서 어떻게 반항하고 저항하라는 밀인가? 물론 전교조 활동을 하고 시민단체에서 활동을 하며 사회의 큰 불의 앞에서는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하지만 그게 나의 개인사가 되어버리면 나는 한순간에 그때의 유아기로 돌아가 버린다. 그때 나는 ㅊ의 아버지에게 대들었어야 했다.


그때처럼 억울하다고 울먹이지만 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온 몸으로 저항했어야 했다.


그럼 어른인 그가 어린 내게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싸움은 아이의 백전백승이다.


어른 앞에 아이는 무조건 굴종해야한다는 도덕률에 사로잡혀 나는 필패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한 번의 학습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분노’를 나보다 약자에게 풀며(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 어리석고도 굴욕적인 행동을 반복했을 것이다.


니체는 우리에게 소리친다.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고 싶은가? 그렇게 살아라 지금 당장 여기에서.”


내 안의 분노는 끝내 나를 불안 장애 환자로 만들었다. 환자가 되어 나의 깊디깊은 상처를 들여다본다.


인도철학에서는 인생의 목표를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에 둔다. 윤회라는 전생의 업보(業報)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전생이란 태어나기 전의 생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이전의 삶을 말한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세계를 반복하였던 삶을 말한다.


천상, 극락의 세계에 들어가는 게 목표가 아니다. 아예 여러 세계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삶의 목표다.


그러려면 지금 당장 다시 태어나도 지금과 똑같이 행하고 싶은 행동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카르페디엠(현재를 잡아라)의 사상이다.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사형장에 군중이 몰려와 야유해도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옆의 십자가에 매달린 죄수들과 수많은 관중들이 야유하지 않았던가.


그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건, ‘지금 이순간의 삶’을 치열하게 산 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때 나는 좌판에 던져진 햇살였다가

중국집 처마 밑 조롱 속의 새였다가

먼 먼 윤회 끝

이제 돌아와

오류동의 동전


- 박용래, <오류동五柳洞의 동전銅錢> 부분



시인은 ‘먼 먼 윤회 끝/ 이제 돌아와’ ‘오류동五柳洞의 동전銅錢’이 되었다고 슬프게 노래한다.


우리는 ‘먼 먼 윤회 끝/ 이제 돌아와’ 지금 무엇이 되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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