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
내가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밝혀주고 표현할 때, 무의식은 보다 좋은 삶의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우리는 보통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 칼 구스타프 융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바빌로니아의 복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주정꾼,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던 부인을 목 졸라 죽인 정신병자, 혹 그들은 ‘회사’의 극비 명령에 따라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닐까요? 신과도 비교되는 이러한 은밀한 작업 방식은 온갖 추측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가상의 나라 바빌로니아에 아주 단순한 복권이 나타난다. 당첨되면 상금을 주는 지극히 초보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차츰 그런 단순한 방식에 흥미를 잃어가고 복권은 점점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한다.
당첨되면 상금을 받기도 하지만 벌금을 물기도 한다. 보상은 점점 커지고 벌칙은 점점 잔인해졌다.
당첨되면 그 나라의 고위직을 맡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기도 하고, 보기를 원치 않는 어떤 여자를 만날 수도 있게 되었다.
또 어떨 때는 자신의 수족이 잘리기도 하고,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완전히 복권에 열광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복권을 관리하는 회사는 드디어 그 나라의 절대적인 권력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주정꾼,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자신의 옆에서 자고 있던 부인을 목 졸라 죽인 정신병자’ 이들도 회사의 극비 명령에 따라 그렇게 하는 건 아닐까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회사가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권력의 속성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니까.
바빌로니아에 우연히 복권이 나타나 차츰 복권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어 갔지만, 그 모든 우연들은 사실은 필연이었다.
주역을 근간으로 하는 여러 점보는 방법들은 우연히 뽑은 효를 통해 운명을 밝혀낸다.
우연은 깊은 무의식의 오묘한 작용인 것이다. 우리 마음에 없는 것은 바깥에 나타나지 않는다.
바깥의 풍경은 내 안의 풍경인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우연히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들도 다 마음의 업보(業報)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의 마음이 지어낸 결과물이다. 바빌로니아의 ‘회사’도 그 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냈다.
한번 복권에 맛들인 마음은 끝장을 보게 되어 있다. 스스로 멈출 수 없다. 그래서 단순하던 복권이 끝내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회사까지 진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원시인들은 어느 누구도 힘을 갖지 못하게 했다. 아무리 많이 공을 세워도 어떤 힘도 주어지지 않았다.
지도자는 단지 명예직일 뿐이었다. 원시인들은 알았던 것이다. 인간이 한번 이기심에 물 들면 끝장을 본다는 것을.
원시인들은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인식하고 밝혀주고 표현할 때, 무의식은 보다 좋은 삶의 방향으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았던 것이다.
원시인들은 모든 장치를 동원해 인간의 이기심이 싹트지 못하게 했다. 자연이 이리도 아름다운 건, 자연은 티끌만치도 이기심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지탱되는 복권 사회다. 우리는 보르헤스의 눈으로 이 세상을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토요일 저녁, 산에서 내려오다가
길을 잘못 접어들어 우연히 그곳에 갔을 때
공터는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추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막다른 세상의 끝에서, 무수히 많은 것들이
그 공터를 빌려 마지막 집을 짓고
공터는 다시 그 집들을 허물면서
스스로의 흔적마저 지우고 있었다
나는 그 작은 공터에서 떨어진 대추 몇 알을 주웠다
마른 우물 바닥에서 능구렁이가 스르륵
스르륵 몸을 감았다 푸는 소리를 들으며
대추알을 줍는 동안
숨 막힐 듯 이상한 향기들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번져 나오고
이 세상 너머의 낯선 풍경들이
잠깐 먼지처럼 뿌옇게 타올랐다가 스러져갔다
- 전동균, <공터가 있다> 부분
시인은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공터를 만난다. 공터의 신묘한 작용을 본다. 대추 몇 알을 주우며 공터의 조화 속으로 들어간다.
사실 시인은 얼마나 오랫동안 공터를 꿈꾸었을까? 오랜 서원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