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고석근


인간에게는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읽기는 무의미하지 않다. - 프리드리히 니체



ㅁ 출판사에서 문자가 왔다. 책이 나왔단다. 아, 내 책이 나왔구나! 온 세상이 나를 축하해주는 듯하다.


공부 모임 회원들에게 나눠 줄 책을 주문했다. 내 책을 내가 주문한다는 게 기분이 묘하다.


어릴 적에는 책이 참으로 귀했다.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책을 발견하면 손으로 집게 되고 읽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한동안 ‘사는 게 뭐지?’하는 질문에 사로잡혔다. 서점에 가서 책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러다 눈이 가고 책을 꺼내 훑어보게 된 책,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쓴 ‘인생론’이었다.


아마 내가 참고서를 제외하고는 난생 처음으로 산 책 같다. 돈이 아까워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도 꼼꼼히 읽었다.


여름 방학 때 집에 가져갔다. 읽다가 마루에 놓아두었는데, 놀러온 동네 아이들이 빌려달라고 했다.


‘응? 철학책을? 평소에 공부와 담을 쌓은 녀석들이?’ 하지만 아이들은 둘려가면서 읽었다.


뒤돌아보면 어이가 없는 것 같지만, 아이들은 인생에 대해 다들 질문하고 있었나 보다.


어떤 아이들은 재미있었다고 했다. 결국 그 책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지만, 책값이 아깝지 않았다.


10대에 인생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봤다는 게, 그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는가?


이제 책이 넘치고 넘친다. 책을 쓰는 작가의 위의도 많이 사라졌다. 한때 작가는 한 시대의 정신이었는데.


글을 쓰는 것이나 자전거를 타는 것이나 산을 오르는 것이나 하나의 취미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현상은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저자의 죽음’과도 연관될 것이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썼건 그 글을 해석하는 독자가 중요하다.’


삼라만상은 항상 생성, 변화 속에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책을 쓰는 동안만 저자다.


그 이후에는 책은 우연히 만나는 독자와의 인연에 의해 천변만화하는 생을 살아간다.


그러한 중중무진의 인연의 그물망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혁명을 일으키는 책들이 있다.


내게는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한 책들이 꽤 있다. 나를 알에서 깨어나게 한 최초의 책은 괴테의 파우스트다.


중3 여름 방학 때 만난 파우스트는 나를 깊은 달밤에 이슬이 맺혀있는 강둑에 앉아 있게 했다.


그 뒤 나를 재탄생하게 한 문학, 사회과학, 인문학 책들. 지금은 니체와 보르헤스가 나를 마구 흔든다.


지금 막 태어난 내 책,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흔들 수 있을까? 가끔 내 글을 읽고 좋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내게 글을 쓰게 하는 힘이다. 태어나자마자 나를 떠나는 내 책, 부디 스스로의 운명을 사랑하기를.



오! 육체는 슬퍼라,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다.

떠나 버리자, 저 멀리 떠나 버리자.

〔......〕

잔혹한 희망에 시달리는 어느 권태는

아직도 손수건의 그 지극한 이별을 믿고 있구나!

그런데, 돛대들이 이제 폭풍을 부르니

어쩌면 바람에 기울어 난파하는 돛대들인가

길 잃고 돛도 없이 돛도 없이,

풍요로운 섬도 없이……

그러나,

오 나의 마음아, 뱃사람들의 노랫소리를 들어라.


- 스테판 말라르, <바다의 미풍> 부분



나도 언젠가는 모든 책을 읽고 바다로 떠날 수 있을까? 더 이상 잔혹한 희망에 시달리지 않고.


바다의 미풍을 맞으며 노래할 수 있을까? ‘오 나의 마음아, 뱃사람들의 노랫소리를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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