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
젠더란 우리가 문화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반복해서 수행(perform)해야 하는 행위다. - 주디스 버틀러
나는 언젠가부터 여장하고 거리를 다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버려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다.
고등학교 축제 행사에 남학생들이 여장을 하고, 자연스레 여성의 몸짓을 하며 여성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 참으로 부럽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상상만 했지 수행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는데, 몸으로 수행하고 나면 어떨까?
여성으로 재탄생한 ‘부활’의 신비로움을 느낄 것 같다. 남성 안에는 여성(아니마), 여성 안에는 남성(아니무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성(性)을 부여받는다. 남녀, 어느 한 길을 가야 한다.
한평생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크게 남을 것이다. 자신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잃어버린 성이 유폐되어 있다.
이러한 원초적 성의 상실이 우리에게 불멸의 사랑의 이미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플라토닉(정신적) 사랑으로.
우리는 오랫동안 육체적 사랑인 에로스를 천하게 보고 정신적 사랑을 고귀하게 보았다.
그러다 신이 죽으며 인간의 몸이 고귀해졌다. 이제는 플라토닉 사랑을 ‘플라스틱 사랑’이라고 조롱하게 되었다.
플라스틱 사랑이라니? 우리가 오랫동안 칭송했던 ‘영원한 사랑’을 썩지도 않는 공해라고 노골적으로 비웃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과 여는 과연 있는 걸까?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말한다. “젠더란 우리가 문화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반복해서 수행(perform)해야 하는 행위다.”
우리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상이 부여하는 성(젠더)에 맞춰 치열하게 성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가?
계속 반복하다 보니 그 성 역할이 골수에 박히게 된다. 성 역할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혐오감이 일어난다.
‘동성애’라는 말만 들어도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린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동성애자의 성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해 왔다면 이성애자들에게 혐오감이 느껴질 것이다.
우리는 기나긴 가부장 사회에서 살아오면서 남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왜곡된 인간이 되었다.
인간이 되지 못한 성들이 우리 안에서 몸부림친다. 우리는 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자신도 모르게 변태적인 성에 관심이 간다. 사람을 보면 남자, 여자로만 보인다. 남자, 여자의 성기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풍부한 인간이 되지 못한 기형적인 인간 군상들.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엽기적인 성이 판을 치는가!
우리는 이제 남녀에 갇히지 않는 성에 대해 상상해야 한다.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온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남미의 어느 수녀는 예수를 여성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엄청난 교단 안팎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그 수녀는 진정한 예수를 만난 게 아닐까? 인간이면서 신인 주님을. 그래서 예수는 그녀에게 여성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예수를 남성으로만 보는 사람들은 가부장 문화 인식의 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영성의 눈으로 보면 신이 어떤 성으로 국한되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남자로 살아가는 나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안쓰러운 남성이 보이고 울고 있는 여성이 보이고 아우성치고 몸부림치는 온갖 나들이 보인다.
누가 내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하고 싶다. “나는 나다!” 아, 내가 나인 경지에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을까?
얇은 막이 터지도록 땀을 쏟았다
땀방울마다 해 하나씩 갇혀
시퍼런 욕망을 속성 재배하였다
근심은 뜯어낼수록 수북이 자랐다
산고가 식는 저물녘
문이 열리고
허리 굽은 아버지가 태어났다
- 조말선, <비닐하우스> 부분
오랫동안 인간은 남성이었다. ‘땀방울마다 해 하나씩 갇혀/ 시퍼런 욕망을 속성 재배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남자다운 남자가 되기 위해 한평생 비닐하우스에 갇혀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