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성
자연으로 돌아가라. 자연은 선(善)이다. 인간은 자연에 더 보탤 것이 없다. 사람의 손은 자연을 해칠 뿐이다. - 장 자크 루소
나는 강의할 때마다 ‘그림책을 읽기’로 수업을 마무리한다. 한 회원이 그림책을 회원들에게 보여주며 읽는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본 후 그렇게 한다. 아마 10여 년은 되었을 것이다. 웬만한 유명한 그림책은 거의 다 읽었을 것 같다.
그림책은 일종의 시(詩)다. 시는 언어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다. 우리는 언어로 세상을 본다.
언어로 보는 세상은 사막이다. 생명이 없다. 우리는 가끔 언어를 넘어서서 세상을 볼 때가 있다.
좋은 예술 작품이나 좋은 풍경을 보았을 때다. 온 몸에 전율이 이는 감동이 일어날 때, 우리는 언어를 넘어선 존재가 된다.
나는 회원들이 그림책을 읽으며 언어에 갇힌 마음을 풀어놓는 힘을 기르게 하고 싶다.
어제 저녁 공부모임에서는 ‘상자 속 친구 - 이자벨라 팔리아 글 · 파올로 프로이에티 그림’을 공부했다.
평화로운 숲속에 웬 상자 하나가 나타난다. 가운데에 작은 구멍 두 개가 뚫린 이상한 상자다.
이른 아침, 눈을 비비며 숲속 동물들이 모여든다. “이게 뭐지?” “누가 상자를 가져다 놓은 거지?” “이 숲속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을까?”
그때 갑자기 상자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상자 안에 있다는 걸 알고 숲속 동물들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반가워!”하고 크게 외친다.
숲은 하나의 커다란 동물의 왕국이다 그 왕국에 한 낯선 동물이 나타났을 때, 다른 동물들은 어떻게 대할까?
그림책은 다른 동물들이 이방인을 온 마음을 다해 환대하는 광경을 보여준다. 정말 그럴 것이다.
삼라만상의 운행 이치는 상생이니까. 그 낯선 동물도 그 왕국의 일원이니 당연히 다른 동물들이 받아주게 되어있다.
아마 아이들은 그 이치를 금방 알아챌 것이다. 그들 안에 풋풋한 동물적 본능이 살아있음으로.
어른들은 인간세계의 언어를 익혀 그런 이치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다른 동물들이 침입자를 내쫓거나 잡아먹으려 하지 않을까?’
인간세계의 이치는 ‘약육강식’이니까. 자연세계에서는 약육강식은 한 측면의 모습일 뿐이다.
자연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이기에 언뜻 보면 약육강식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의 몸을 나누는 것이다.
풀을 뜯어먹는 얼룩말, 얼룩말을 잡아먹는 사자, 사자가 죽어 썩으면 풀이 그를 먹는다.
누가 누구를 먹는 게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먹히는 게 아니다. 서로의 살을 나누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관계다.
그래서 숲속 동물들은 낯선 상자속의 동물을 환대한다. 하나의 생명체이니까. 우리도 다른 사람을 보면 무작정 다가가고 싶지 않은가?
이게 바로 ‘사회성’이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 이 사회성으로 우리는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다. ‘아차, 이러면 안 되지. 사람이 가장 무섭지.’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멀리한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며 살아가는 현대 황금만능사회, 여기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사회성’이 되고 있다.
우리는 원래의 사회성을 회복해야 한다. 숲속 동물들은 상자에서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낯선 동물을 끝내 한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우리에겐 이런 사회성이 있다. 이 사회성을 잃어버린 현대인, 본성대로 살지 않으니 온갖 정신질환에 시달린다.
여자가 부엌에서 혼자
조용히 콩깍지를 까고 있다
블랙 아이드 피라는 이름의 콩이다
프라이팬에 볶아먹는다
이름 그대로
검은 눈 같은 작은 콩이다
딸이 그 옆을 지나간다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딸도 콩깍지를 깐다
심심한 손녀가 부엌에 들어온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손녀도 콩깍지를 깐다
〔......〕
정신이 들자
조용히 콩깍지를 까고 있는 여섯 명의 가족
테이블 위에는 조용한 콩깍지의 산
“우리가 왜 콩깍지를 까는 거지?”
그리고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가장 조용한 의문 하나가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들어 와
살짝 테이블 옆에 앉는다
- 고이케 마사요, <가족> 부분
우리에겐 인류 모두가, 삼라만상이 하나의 가족이었던 아스라한 기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