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주인
그 사람은 또 한 군데를 가리키며 서명하라는 것이었다. “저, 저는... 글자를 모릅니다.” “그럼 너 좋을 대로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넣어!” 아큐는 동그랗게 그리지 못한 것이 수치스러웠지만, 그 사람은 그것을 따지지 않았다.
- 루쉰,『아큐정전』에서
아큐는 도둑 누명을 쓰고 혁명군에 의해 체포된다. 그는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앞에서도 동그라미를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결국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총살을 당한다. 그는 살다보면 목이 잘리는 것을 면할 수 없을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왜 이렇게 어리석고도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을까? 부모가 없어서? 머리가 나빠서?
아주 하잘 것 없는 미물들을 생각해보자. 모기나 파리 같은 것들. 그런 것들도 자신이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 미물보다는 더 능력이 있는 인간, 아큐는 왜 그들보다 더 우매하게 살다가 우매하게 죽어가는 걸까?
‘삶의 주인’으로 살지 않아서 그렇다.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항상 남의 눈을 의식하고 도덕을 중시한다. 철학자 니체는 주인의 삶과 노예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예의 행동 원칙은 ‘옳음과 그름’이다. 행동의 기준이 밖에 있다. 주인의 행동 원칙은 ‘좋음과 싫음’이다.
주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싫은 것은 하지 않기에 갈수록 그의 세계가 커진다.
노예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차츰 자신의 마음조차 모르게 된다.
오로지 그는 주인이 설정한 도덕에 맞춰 살아간다. 아큐의 생각은 ‘무엇이든지 성현의 말씀에 맞아떨어졌다.’
그는 길을 가다 이를 잡는 왕털보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간다. 결국 그와 싸움이 붙는다.
그는 힘이 약해 얻어터진다. 그러자 그는 “군자는 말로 하지, 손을 쓰지는 않아!”하며 자신을 방어한다.
그는 ‘남자를 유혹하려는 여자’는 늘 조심스럽게 본다. 철저히 가부장 문화를 수호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어느 날 욕망의 물결이 그의 도덕의 둑을 허물어 버린다.
그는 조영감 댁에서 일을 하다 유일한 여자 하인, 청상과부 오마에게 달려든다. “나하고 자자! 나하고 자자!”
도덕을 중시하며 살아가는 노예는 점점 반도덕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자신의 욕망으로 살아가는 주인은 점점 도덕적인 인간이 되어간다.
아큐가 조금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살았더라면, 그렇게 비명횡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항상 도덕적으로 살아가니 안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이 그를 그냥 두지 않는다. 그는 약자들만 보면 으르렁거리고 힘없는 여승에게 성추행을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믿어야 한다. 오랫동안 만들어진 인류의 마음은 세상의 지혜를 다 담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면 자신의 길이 열린다. 그 길은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길이다.
우리는 어릴 적에 ‘착한 아이’로 길러졌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노예의 길을 갈 수가 있다.
새 시장에 갔었지
그리고 새를 샀지
내 사랑
그대를 위해
〔......〕
철물 시장에 갔었지
그리고 쇠사슬을 샀지
무거운 쇠사슬을
내 사랑
그대를 위해
그 다음엔 노예 시장에 갔었지
그리고 널 찾아 다녔지
하지만 나는 너를 찾지 못했네
내 사랑이여.
- 자크 프레베르, <내 사랑 그대를 위해> 부분
모든 폭력은 ‘내 사랑 그대를 위해’ 일어나게 된다. 우리가 삶의 주인이 되기가 너무나 힘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