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법

by 고석근

분류법


그 많은 순간들과 날짜들로 혼합되어 있더라도, 그 많은 순간들과 그 많은 날들은 단 한 순간, 즉 인간이 스스로가 누구인가를 아는 순간,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환원될 수 있다. 모든 것들이 정확하게 한 사람에게,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세기의 시간이, 그런데 단지 현재에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그의 저서 ‘말과 사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르헤스의 텍스트에 인용된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는 동물이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료로 처리하여 박제로 보존된 동물. 사육동물. 젖을 빠는 돼지. 인어. 전설상의 동물. 주인 없는 개. 광폭한 동물. 셀 수 없는 동물. 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털로 된 붓으로 그릴 수 있는 동물. 물 주전자를 깨뜨린 동물’로 분류되어 있다.”


푸코는 보르헤스의 동물 분류법을 보고 “지금까지 간직해온 나의 사고, 즉 우리 시대와 풍토를 각인해주는 우리 자신의 사고의 전 지평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웃음을 지었다”고 했단다.


우리에게 익숙한 동물 분류법은 무엇일까?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로 분류하는 방법일 것이다.

이렇게 나누면 과학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분류법으로 동물을 나누다 보면 결국에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있다.


이러한 과학적인 분류법을 익힌 사람은 다른 생명체들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잡아 먹고 여러 실험용으로 쓸 수 있다.


하물며 생명도 갖지 않은 땅, 산, 바다 같은 무생물이야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 결과 코로나19가 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푸코는 ‘인간이 최고’라는 분류법을 단박에 깨뜨린 보르헤스의 분류법에서 인류의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푸코는 ‘담론의 형태는 권력의 담론’이라는 말을 했다. 과학적인 분류법이라는 담론은 당대의 권력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바로 자본가들이다. 자본가는 중세를 무너뜨리고 등장했다. 중세의 신 중심 사고를 인간 중심사고로 대체했다.

그래야 인간이 마음껏 돈을 벌고 일을 하고 소비를 할 수 있으니까. 그들은 과학을 신학의 자리에 앉게 하여 인간 중심 사고를 정당화했다.


삼라만상을 수직으로 분류하게 되면 인간도 수직으로 분류하게 된다. 인간 위에 인간이 있고 인간 아래에 인간이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는 근대의 인간중심, 과학적 사고를 넘어서야 하는 시대다.


그럼 보르헤스처럼 이 세상의 분류법을 거부하고 살아가면 어떻게 될까? 이 시대의 언어의 감옥에서 해방된다.

보르헤스는 이 시대의 언어에서 해방되어 존재하는 삶의 신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많은 순간들과 날짜들로 혼합되어 있더라도... 인간이 스스로가 누구인가를 아는 순간...... 모든 것들이 정확하게 한 사람에게,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세기의 시간이, 그런데 단지 현재에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바로 카르페디엠(현재를 잡아라)이다. 오로지 현재만이 형형하게 존재의 빛을 내뿜게 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이라는 우리의 시간관념은 이 시대가 시간을 직선으로 분류한 방법을 우리가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이 심어준 생각을 다 내려놓고 텅 빈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오로지 시간은 현재뿐이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게 될 것이다.


진리는 번개처럼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이지, 이성으로 분석하며 알아가게 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세상이 심어준 분류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야 기후위기 등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지 모르는 대재앙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장대끝 매달린 대조롱 속에는

비둘기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아이들이 제기로 조롱을 치면

찢어진 거죽을 뚫고 비둘기가 날아오르기 마련.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

그래서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전날 밤, 그 속에 갇힌

비둘기의 불안은 헤아리지도 못하고!)


- 민영, <대조롱 터뜨리기> 부분



대조롱을 제기로 치며 비둘기의 불안을 생각하는 아이들은 얼마나 있었을까?


대다수 아이들은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는 언어에 갇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그런 생각이 언뜻 떠올랐더라도 ‘평화’를 위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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