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우리는 지배 권력에 훈육되지 않는 우리 삶의 속성을 길러야 한다. - 미셸 푸코
조선 시대에는 왕의 말 한마디에 사약을 받고 유배를 갔다. 왕이 그 당시의 ‘체제’였기에 그렇다.
인류사회는 어느 시대나 어떤 체제에 의해 질서를 유지했다. 반체제 인사는 가혹하게 처벌했다.
서양 중세에서는 기독교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마녀사냥을 했다. 그들을 공개 처형한 것은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다들 그러한 처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카)’라고 했다. 역사를 과거의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 끊임없이 대화하게 하지 않으면, 과거는 항상 처참하고 현재는 항상 살만한 사회가 되어 버린다.
중요한 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다. 지금 여기의 역사는 안녕한가? 미래의 눈으로 보면 어처구니없는 처벌은 없을까?
우리는 ‘돈 없는 게 죄’ ‘집 없는 게 죄’ ‘부모를 잘못 만난 게 죄’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아니 돈 없는 게 죄라니? 집 없는 게 죄라니? 부모를 잘못 만난 게 죄라니? 단순한 푸념일까?
이 말들에는 이 시대의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운 지혜가 있다. 이 말들에 공통적으로 담겨 있는 것은 이 시대의 체제에 반하는 것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자본주의다. 자본이 주가 되는 체제다. 자본은 계속 증식해야 체제가 유지된다.
자본 증식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방해가 되는 것들은 자본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죄가 된다.
나이가 들어 일하는 능력이 떨어지면 명퇴를 당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아무리 좋은 예술 작품도 팔리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좋은 스펙을 가진 젊은이가 취직을 하지 못하는 것도 그가 자본의 증식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원에 모여 있는 노인들, 노숙자들. 그들은 유배된 것이다. 실업자가 되어 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실업자는 자신의 방이 유배지다.
하지만 이런 ‘처벌들’은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라는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체제 민주주의다.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출발했다.
우리는 이 둘의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자본주의의 장점을 살리면서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아주 오래 전, 다섯 살이 된 큰 아이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화면에 ㄴ 대통령이 등장했다.
큰 아이가 물었다. “아빠, 대통령이 뭐야?” “정치하는 사람이야.” 큰 아이가 다시 물었다. “정치가 뭐야?” “나
라 살림살이야.”
큰 아이가 또 물었다. “대통령이 높아?” “응.” 큰 아이는 의아한 듯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빠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아니.” ‘헉! 어쩌자고?’ 큰 아이는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아빠는 뭔데?”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국민이야!” 그러자 큰 아이가 두 손을 들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야, 우리 아빠 국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코웃음이 나온다. 그 장면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부자지간의 대화가 얼마나 신선했는가!
국민이 최고 높은 세상이 되면, 돈 없어 받는 죄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인류사의 오랜 ‘마녀사냥’이 끝날 것이다.
감옥 속에는 죄인(罪人)들이 가득하다
머리통만 커다랗고
몸들이 형편없이 야위었다
세계를 불태우려고
기회를 엿보는 어릿광대들
- 이세룡, <성냥> 부분
우리는 가끔 성냥갑에서 튀어나온 죄인들과 마주친다. 그들은 늘 ‘세계를 불태우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화르르 태우며 우리에게 달려든다.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죄를 사해줄 때까지 우리 앞에 출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