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의 제국

by 고석근

기호의 제국


인간 속에는 피조물과 창조자가 통일되어 있다. 인간 속에는 재료, 파편, 점토, 무의미한 것과 혼돈이 있다. 또한 인간 속에는 창조자, 형성자, 신을 닮은 신성이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ㅇ 축산’이 있다. 벽에는 소들이 평화롭게 노니는 커다란 대관령 풍경화가 걸려 있다.


가끔 거기서 아내와 고기를 샀다. 생각해 본다. 왜 거기서 고기를 샀을까? 축산이라는 기호, 대관령이라는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실제 거기엔 축산이 없고 대관령이 없는데... . 그래서 고대 중국의 현자 노자는 말했다.


‘명가명 비상명 名可名 非常名’ 어떤 대상, 사물에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은 그 대상, 사물의 진정한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 전체가 그렇다. 기호의 제국이다. 만일 인간에게 기호(언어)가 없다면, 이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일 것이다.


하늘을 하늘이라고 해야 하늘이 있고, 땅을 땅이라고 해야 땅이 있다. 하늘과 땅이라는 언어가 없는 동물에겐 하늘과 땅이 어떻게 보일까(어떻게 존재할까)?


천지창조는 오래전에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안보이던 것이 보인다(나타난다).


현대양자물리학 이론에는 ‘관찰자 효과’라는 것이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우리가 관찰하기에 존재하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언어가 없는 동물 세계는 마법의 세계일 것이다. 동물들은 무한한 신비 속에 살아갈 것이다.


우리도 가끔 동물이 될 때, 이 세상은 얼마나 신나는가! 술에 취해 걸어가며 보는 세상.


다 정겨운 이웃들이 아닌가! 사물들이 다 살아나지 않는가? 언어가 빈약했던 원시인들이 보던 세상이었을 것이다.


정교한 언어로 살아가는 문명인들, 마법을 잃어버렸다. 마법을 잃으면 기계적인 몸짓만 남는다.


인간은 견딜 수 없다. 우울, 권태에 몸부림친다. 알코올 중독, 마약에 취한다. 크게 보면 문명 자체가 일종의 마약이다.


다들 무언가에 취해 살지 않는가! 일에, 돈에, 권력에, 명예에... .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는 올바르게 취해 살지 않는 인간에 대한 경고 같다.


기사가 되어 천하를 주유하다 집으로 돌아온 돈키호테는 제정신으로 돌아오자마자 죽어버리지 않는가?

돈키호테의 눈에는 다 마법의 세계였다. 소설가 보르헤스는 소설 ‘돈키호테’를 그대로 쓴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가 뛰어난 현대 소설이 되는 기적을 보여준다.


하나의 기호가 시대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성춘향과 이도령’은 새로운 모습으로 계속 나타나지 않는가?


보르헤스는 소설 ‘바벨의 도서관’에서 이 세상은 도서관이고 우리는 모두 사서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떤 사서가 되어야 할까? 기존의 분류법에 따라 책을 가지런히 진열해야 할까?


그러면 잠시 마음은 편할 것이다. 정연하게 질서 잡힌 도서관에서 사서는 안심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눈부시게 변하는 이 세상에서 기존의 질서, 법칙들이 여전히 삶의 지침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새로운 기호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철학자 니체는 ‘인간 속에는 피조물과 창조자가 통일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피조물과 창조자’로 살아가야 한다. 기존의 기호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기호를 창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미줄 같은 기존의 기호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 타나토스(죽음의 본능)에 취해 자신이 행복한 줄 착각하면서.



나는 간통을 하다가 생을 다 보냈다. 시를 훔치려고 소설을 훔치려고 외람된 기호를 가장했다. 아, 나는 남의 것을, 모든 남의 몫뿐이었던 세상을 살다 간다. 가난한 눈물로 물그림을 그리던 책상은 긍지처럼 오래 썩어가게 해달라. 단 하나, 내 것이었던 두통이여. 이리로 와서 심장이 터지는 소리를 막아다오. 그리고 떳떳한 사랑을 하던 부럽던 사람들 곁을 떠나는 출발을 지켜봐 다오.


- 이상희, <봉함엽서> 부분



시인은 슬프게 노래한다. ‘남의 것을, 모든 남의 몫뿐이었던 세상을 살다간다’고. ‘단 하나, 내 것이었던 두통이여.’


하지만 시인이 노래하는 이 순간은 ‘떳떳한 사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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