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없는 세상을 위하여
인간의 사회는 폭력과 위선과 이기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다. - 블레즈 파스칼
우리가 항상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 곤충으로 알고 있는 꿀벌은 실은 20%는 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게으름뱅이 20%의 꿀벌을 제거하고 부지런한 꿀벌만 남겨 놓으면, 부지런한 꿀벌의 20%가 게으름뱅이 꿀벌이 된다고 한다.
생명체의 생존법이라고 한다. 게으름뱅이들은 예비군이라고 한다. 어떤 새로운 상확에 맞닥뜨렸을 때, 그들이 그 위기에 대응한다고 한다.
인간사회에도 그런 예비군들이 있다. 일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들, 이들에게 일하는 자들이 외친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생명체의 원리를 모르는 소리다. 어느 조직이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 적당히 일하는 사람, 슬슬 놀며 일하는 척하는 사람... 다양하다.
어느 회사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일한 만큼 돈을 주는 성과급 제도를 시행했더니, 헌신적으로 남의 일까지 도와주던 사람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더란다.
그들은 열정을 잃어버린 것이다. 돈으로 나를 매수하다니! 인간을 돈의 노예로 보는 천박한 제도를 그들은 거부한 것이다.
인간 사회에는 참으로 다양한 군상의 사람들이 살아간다. 그들을 전체 인류의 눈으로 봐야 한다.
인간은 개별자이면서도 유(類)적 존재다. 인간은 하나이면서 전체인 것이다. 개인은 자신도 모르게 전체를 위해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솟아오르는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야 한다. 그 소리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이다.
밖에서 주어지는 의무에 너무 충실하다 보면, 자신의 소명을 잃어버리기 쉽다. 살아가다 문득 길을 잃었다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봐야 한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며 가끔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자신의 영혼이 잘 따라오는지를 알려고.
오늘 아침 끔찍한 인터넷 뉴스를 보았다. ‘유럽 전역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의문의 주사기 테러가 잇따르고 있다’
영국에 사는 ㅇ 군은 친구들과 술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낯선 사람에게 주사기 테러를 당했다고 한다.
자신이 공격당했는지 조차 알지 못했는데, 몸을 일으키려하자 고개를 들 수도 없었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사건이 프랑스에서 지난 3월 말부터 300건 이상의 관련 민원이 당국에 접수됐다고 한다.
주사기 테러가 폭행, 강간, 인신매매 등 중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하며 그 뉴스는 끝을 맺었다.
이어 또 다른 끔찍한 뉴스, ‘대구 방화, 스프링클러 없어 피해 키워’
용의자는 출입문 앞을 막고 방화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무실 직원들이 도망을 치고 싶어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단다.
ㄱ씨만이 필사적으로 탈출에 성공해서 증언을 했는데 범인이 “같이 죽자!”하고 크게 외친 후에 인화물질에 불을 붙였단다.
이 방화사건으로 용의자를 포함하여 총 7명이 사망을 하고, 50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 참혹한 총기난사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왜 이 시대에 갑자기 테러리스트들이 대거 출몰했을까?
그들은 ‘어떤 소명’을 띠고 그런 역할을 하는 건가? 본인들도 ‘자신이 미쳤다’는 것을 잘 알 텐데.
명상록 ‘팡세’의 저자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의 사회는 폭력과 위선과 이기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폭력이 위선과 이기주의가 하나가 되어 인간사회를 받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폭력 없는 세상을 살아가려면, 위선과 이기주의를 함께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은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파스칼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
겨울은 외투주머니에서 울고
추운 손들은 난로 같은 사람을 찾는다
오후의 저무는 해 아래 모두
깡마른 기타처럼 만지면 날카롭게 울부짖을 듯하다
싸구려 운동화처럼 세월이 날아가는데
생활은 변한 게 없고 아무도 날 애타게 부르지 않고
〔......〕
내 장갑을 누군가에게 벗어줄 기쁜 위안이 그립다
희망의 작은 손전등을 들어
내게 오는 자를 위해 길을 비춘다
나는 즐거운 타인이 있으므로 살아가고
삶은 그들에게 벗어나려 할 때조차
그들에게 속하려는 끝없는 노력이므로
감미로운 고통에 싸여 길을 비춘다
- 신현림, <겨울 정거장> 부분
‘감미로운 고통에 싸여’ 살아가는 시인도 있고, ‘참혹한 고통에 싸여’ 살아가는 테러리스트도 있는 세상.
그들은 같은 메시지를 정반대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