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언어는 삶이 아니다. 언어는 삶에 명령을 내린다. 삶은 말하지 않는다. 삶은 듣고 기다린다. - 프란츠 카프카
공부 모임의 한 회원이 남편과 함께 초등학생인 두 아이를 데리고 ‘강남’에 다녀온 얘기를 했다.
큰 길의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아이들이 개 흉내를 내며 걸어가더란다. “멍멍!” “멍멍!”
얼굴이 까만 아이들. 그 회원은 생각했단다. ‘강남 아이들은 이런 장난을 치지 않을 텐데.’ ‘사람들은 아이들이 시골에서 왔다고 생각할 텐데.’
그 아이들은 왜 개 흉내를 내었을까? 강남이 주는 압박감을 해소하기 위한 몸짓이었을 것이다.
원시인들은 동물 가면을 쓰고 의례행위를 했다. 자신들의 우상, 동물이 되어 춤을 추며 무서운 동물들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했다.
강남 앞에서 주눅 든 마음을 그렇게 해소하는 아이들, 어른들은 그런 의례행위를 하지 않았기에 마음의 상처가 오래갈 것이다.
원시인들은 마을 앞에 나무를 심었다. 그 나무는 자라며 우주목이 되었다. 그 나무에 의해 마을은 우주의 중심이 되었다.
원시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우주 중심지에 살았다. 그러다 문명사회가 되면서 중심지는 따로 정해졌다.
강남이 언젠가부터 대한민국의 중심이 되었다.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은 한순간에 변두리가 되어버렸다.
사람마다 자신이 살고 싶어 하는 곳은 다 다르다. 하지만 강남이 생기면서 자신이 살고 싶어 하는 곳들은 다 누추해져버렸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인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경험한다. 평범해 보이던 가방이 명품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광휘를 빛나는 기적을.
단군신화는 이름이 부여하는 무서운 힘을 잘 보여준다. 어느 날, 청동기를 사용하는 종족이 석기를 사용하던 곰 토템부족과 호랑이 토템부족을 점령했다.
자신들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했다. 천손(天孫), 천신(天神)의 자손에게 동물을 신으로 섬기던 종족들이 어찌 복종하지 않을 수 있으랴?
천신의 후예들은 곰 부족과는 혼인을 맺고 호랑이 부족은 노예로 삼았다. 호랑이 부족은 인간이 되지 못했으니 순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정복자들은 석기보다 강한 청동기를 사용했을 뿐인데, 힘으로 그들을 정복했을 뿐인데, 피정복자들은 장신까지 정복당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삼라만상에 이름을 붙여 그들을 질서 있게 배치한다. 어떤 것은 숭배의 대상이 되고 어떤 것은 하찮게 된다.
독일의 소설가 카프카는 말했다. “언어는 삶이 아니다. 언어는 삶에 명령을 내린다. 삶은 말하지 않는다. 삶은 듣고 기다린다.”
우리는 민주주의 세상에 살고 있다. 민주주의는 민(民)이 주(主)인, 한 인간이 천지자연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체제다.
남이 붙여주는 이름으로 살아가면, 그 언어의 명령을 들으며 살아가야 한다. 자신의 삶은 다소곳이 명령에 따르게 된다.
이름을 자유롭게 붙일 수 있는 힘, 마음이 자유로운 영혼만이 가능하다.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언어에 좌우되지 않는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만이 가능하다.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 위해 시적 상상력을 지녀야 한다. 시는 자신만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산문적인 언어에 젖어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남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시인은 언제나
기호들로 뒤덮인
거대한 벽 한가운데 있다
도시는 어디에서나
제 사랑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
그대는 그 벽에서 오직
허무와 고통의
가벼운 향기만을 원한다
존재와 무와 기호를
영원히 가르는.
- 삐에르 쟝 주브, <세상의 끝> 부분
시인은 ‘세상의 끝’에 설 수 있는 사람이다. ‘기호(언어)들로 뒤덮인 거대한 벽 한가운데’
거기서 그는 ‘존재와 무와 기호를/ 영원히 가르는.’ ‘가벼운 향기’를 맡는다. 실재의 순간이다.
기호의 안개 속을 온 몸으로 헤쳐 나가야 도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