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예술의 본질적인 점은 존재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완전성과 충실성을 산출한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존재의 긍정이고 축복이며 존재를 신성하게 하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독일의 매체 철학자 키틀러는 축음기와 사진이 우리에게 ‘실재계’를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마음에 없는 것은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이다. 또 한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축음기는 우리가 듣지 않으려한 것도 다 들려준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의 경험을 한다.
사진도 그렇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우리가 보려고 했던 것은 중심에서 사라진다.
모든 것들이 평등하게 존재한다. 실제 세상의 모습이다. 이 세상의 실상은 만물제동인 것이다.
만물제동(萬物齊同), 장자는 말했다. “만물은 도(道)의 관점에서 본다면 등가(等價)이다.”
성자들만 볼 수 있었던 ‘진여(眞如 진실한 모습)의 세상’을 우리는 축음기와 사진을 통해 쉽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존재의 긍정이고 축복이며 존재를 신성하게 하는 것(니체)’이다.
현대 철학의 지평을 새롭게 연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생각하지 말고 보라!”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보는 게 바로 사진기다.
그는 또한 말했다. “인간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진실은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눈앞에 있는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한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비싼 돈을 지불하고 참가한 음악회, 사람들은 조용히 기다렸다. 선사(禪師)들처럼 침묵을 지켰다.
유명 피아니스트가 침묵을 가르며 뚜벅 뚜벅 걸어 들어왔다. 피아니스트의 소리만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그는 피아노 앞에 조용히 앉았다. 사람들은 천상의 음악을 듣기 위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피아노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침묵, 침묵을 깨고 이따금 소음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낮은 기침 소리, 옷자락 소리, 신발 끄는 소리... 평소에 듣지 못하던 소음들이 가득 채우는 연주회장.
사람들은 일상의 소음이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를 느꼈을 것이다. 일찍이 노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다섯 가지 색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다섯 가지 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한다. 다섯 가지 맛은 사람의 입맛을 잃게 한다.’
자연이 주는 무한한 색과 소리와 맛이다. 인간이 만든 색, 소리, 맛은 당장에는 좋을 것이다.
우리는 차츰 거기에 길들여진다. 다른 것들은 서서히 사라져 버린다. 일상의 삶이 누추해져버린다.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하는 빵맛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급식빵으로 받은 옥수수빵을 아주 조금씩 떼어 먹었다.
반은 먹고 반은 책보자기에 고이 싸가지고 와서 엄마에게 주었다. 엄마도 한 조각 한 조각 음미하면서 드셨다.
이제 그 맛을 어느 빵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내 혀가 제빵사들이 만든 맛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어릴 적 추운 겨울 방에서 듣던 문풍지 소리, 먼데서 들려오는 야생 짐승들의 울음소리, 쥐들이 잽싸게 달려가는 소리...... 그 소리들을 다시는 들을 수가 없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김광균, <설야> 부분
‘설야’에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듣는 시인의 귀. 누구나 이런 귀를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이런 귀를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