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길

by 고석근

나의 길


실재가 추동하는 네 욕망에 따라 행동하라. - 자크 라캉



지금도 고교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중학교 다닐 때,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서울의 사촌형이 운영하는 양복점에 취직할 예정이었다.


엄마는 내게 말했다. “양복점에 취직하면, 명절 날 양복을 입고 고향에 올 수 있어 좋지 않겠느냐?”


그런데, 서울에 등록금이 무료이고 교복과 교과서를 주고 졸업하면 취직까지 시켜준다는 국립고등학교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 도착하던 날, 서울역 광장에 서서 망연히 남대문을 바라보았다. 도로를 꽉 메운 차들이 햇살에 눈부셨다.


10대 후반, 그야말로 피가 펄펄 끓는 나이. 나는 시들어갔다. 할 일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졸업하면 다 취직을 시켜줘야 하니 시험문제를 엄청 쉽게 내주었다.


반 평균이 80점을 넘었다. 나는 방세가 싼 달동네에서 자취를 했다. 가끔 아이들과 어울려 자취방에서 소주를 마셨다.


뭐 신나는 게 없었다. 그러다 찾은 소일거리. 무협지 읽기였다. 학교만 다녀오면 만화방에 가서 무협지를 빌렸다.


밤이 이슥하도록 무림의 세계에 빠져 들어갔다. 나는 무림의 절정 고수가 되어 천하를 누볐다.


나는 정파, 사파를 가리지 않고 사악한 무리들을 찾아내 처단했다. 지금 같으면 게임에 빠져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3년을 허송세월했다. 3학년이 되자 대학에 진학할 아이들은 몰래 학원을 다녔다.


나도 대학에 가고 싶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우연히 대학 건물을 보게 될 때는 가슴이 저려왔다.


무림의 절정 고수가 현실로 돌아오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나는 시간만 나면 눈을 감았다.


눈만 감으면 나는 한순간에 무림의 고수로 변신했다. 천하를 주유하며 수많은 미녀들을 만났다.


막막하던 고교시절은 이제 먼 과거가 되었다. 그때의 기억들은 세월의 강물이 다 휩쓸고 간 것일까?


나는 30대 중반이 되며, 자유인이 되어 세상을 떠돌았다. 내 안의 알 수 없는 힘이 솟아올라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힘에 이끌려 나는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수행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나는 진흙 속에서 ‘나의 길’을 찾고 싶었다. 여러 분야의 공부도 하고, 밤새 술을 마셨다.


신화 공부를 하며 나는 내가 크로노스의 시간에서 벗어나 카이로스의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과거에서 현재로 미래로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에서 빠져나와 나는 나의 시간을 만나게 되었다.


‘나의 시간’은 미래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떨 땐, 깊은 밤에 고여 있었다. 우리는 별세계에서 술을 마셨다.


나는 어렴풋이 ‘나의 길’을 보며 나의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무협지를 보며 허송세월한 고등학교 시절.

그 시절이 물결처럼 내 앞으로 밀려왔다. 그 시절은 나의 길을 가는 여정이었다. 시선 이백은 ‘자고로 문인은 협객의 꿈을 꾼다’고 노래했다.


나는 글을 쓰며 알았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무협지를 본 건, 세상에 대한 울분이었다.


나의 가난에 대한 분노, 가난한 어린 영혼을 방치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였다. 골방에서 키운 협객의 꿈.


그 정신이 퍼렇게 살아 지금의 나를 글을 쓰게 할 것이다. 지나간 과거가 나의 생생한 현재가 되었다.


현재는 나의 미래를 꽃 피우는 씨앗이 되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 하나로 어우러졌다.


나는 가끔 ‘현재’에 머문다는 걸 느낀다. 카르페 디엠, 그 순간은 현재를 잡게 되었다. 이따금 먼 역사적 사건들도 내게 일어났다.


협객을 꿈꾸었던 수많은 문인들, 나는 그들의 살아있는 정신을 만날 때가 있다. 그들은 지금도 나를 통해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먼 훗날 누군가의 마음에 살아 있을 것이다. 현재는 영원한 현재다. 현재가 과거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건, 습관일 뿐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산다는 건, 매순간, 무한한 생성이다. 나는 언제나 무한한 생성 속에 있다.


내가 생성의 주인이다. 천지창조는 매순간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나는 나의 길을 가지만, 모든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알지 못한 모든 여인들을 위하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체험하지 못한 모든 시간들을 위하여

〔......〕

너는 내가 나를 확신할 수 있을 때

내 머리 위에 솟아오르는 위대한 태양이다


- 폴 엘뤼아르, <나는 너를 사랑한다> 부분



일즉다 다즉일 一卽多 多卽一, 하나는 전체이고 전체는 하나다. ‘내가 나를 확신할 수 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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