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19세기에는 신이 죽었나는 것이 문제였다. 20세기에는 사람이 죽었다는 게 문제다. - 에리히 프롬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소송’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군가 요제프 K를 모략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아침 체포당했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검은 복장의 두 사내가 K의 식사까지 빼앗아 먹고는 말한다. “당신은 체포된 거요.”
요제프 K가 소송에 말려든 지 1년 후, 그는 두 남자에 의해 외진 채석장으로 끌려간다.
한 남자가 K의 목에 두 손을 대자, 다른 남자는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어 두 번 돌렸다.
“개 같군!” 하고 그는 말했으나, 자신은 비록 죽어도 치욕은 남을 것 같았다. 그는 긴 악몽을 꾸고 있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제 죽어가니 악몽을 깨야 하는데, 죽어도 치욕은 남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마지막 출구가 있을까?
오래 전에 한 시인의 죽음에 대해 전해들은 적이 있다. 한이 많은 그 분은 죽을 때, “개 같은 세상!”이라고 했단다.
사람은 죽을 때 다 내려놓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내려놓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요제프 K는 체포된 후,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최종 판결을 내린다는 상급법원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체포는 되었는데, 그 후의 모든 상황들은 안개에 가려져 있다. 알려고 하면 할수록 K는 미궁에 빠져든다.
‘문 뒤에는 ‘법’이 군림하고 있다고 한다. 법정은 주택가의 지붕 밑 다락방에 설치되어 있다.
법관들은 판자벽 안에 앉아 있고, 창으로는 빨래들이 보인다.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K는 지쳐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점점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고, 유죄가 확정되어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지쳐가던 그는 처참한 처형 앞에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소송’은 물질지상주의의 사회가 겪을 수밖에 없는 참담한 비극을 보여준다. 물질이 ‘절대 반지’가 되면 누구나 반지를 찾아 나선다.
물질을 일단 손에 얻으면, 다른 사람들의 야수 같은 눈빛을 감당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소송을 당할지 모른다.
요제프 K가 죄가 있어서 소송을 당한 게 아니다. 물질을 숭배하는 세상에서는 누구나 그처럼 당할 수 있다.
물질지상주의의 사회는 촘촘한 그물망 같은 관료조직으로 통제를 한다. 우리가 관공서에 갔을 때, 벽을 마주한 느낌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맡은 역할밖에 할 수 없기에, 우리의 질문에 대해 책임감 있는 답변을 할 수가 없다.
전체는 보이지 않고 부분만 눈앞에 보이는 세상, 우리는 절망한다. K가 억울하게 소송을 당해도 어찌 할 수 없는 이유다.
요제프 K가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혐의가 무엇인지 어떤 기관에서 나왔느냐고 물어도 자신들은 그런 것은 모른다고 한다.
그들은 K를 체포할 권한만 가진 것이다. 전체 사회를 통제하는 최고 조직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요제프 K는 죽어가면서도 제대로 변론도 하지 못하고 최고 심판을 내리는 법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이유다.
물질을 놓고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세상에서는 삶 자체가 소송이 된다. 평소에 온순하던 사람이 갑자기 돈 앞에서 야수로 변하는 경우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는가?
그의 손아귀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일상의 삶 자체가 검사이고, 판사이고, 변호사이고, 법정이고, 형무소다.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
세월이여!
소곰보다도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더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 김용호, <주막에서> 부분
언젠가부터 길 옆 주막이 없어졌다. 시골에 가서 자전거 타고 여기저기 다니다 문득 만나는 주막.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에는 차들이 쌩쌩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