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의 역사다. - 칼 융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그의 저서 ‘블리스로 가는 길’에서 원시인이 어떻게 가젤을 사냥하는 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작은 언덕 위로 올라가더니 땅을 고르고 거기에 가젤을 그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 남자가 활과 화살을 들고 태양이 떠오르는 쪽을 향해 섰습니다. 그는 화살로 가젤 그림을 쏘아서 목 부분을 맞추었습니다. 여자는 가까이서 두 팔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산에서 내려가 진짜 가젤을 사냥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말한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태양의 힘의 대리인 자격으로 사냥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의례를 통해 자신들을 지금 일어나는 사건과 온전히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문명인들은 자신의 모든 행동을 자신들이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샘물이 솟아나오지 않는다.
자신이 한다고 생각하는 행동들은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시 한다. 그런 이기적인 행동에 어떻게 천지자연이 조응하겠는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느낀다. 세상을 위해서 하는 이타적인 행동에는 알 수 없는 큰 기운이 함께 한다는 것을.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문명인들은 삶의 권태에 진저리를 치게 되고,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그들은 점점 자극적인 쾌락을 찾게 되고 서서히 변태적인 인간이 되어간다. 우리 사회에 온갖 성추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동학의 주문에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가 있다.
시천주는 하느님(천주)을 모신다는 것이다. 항상 우리 가슴에 ‘신성(神性)’을 품고 살아가라는 것이다.
조화정은 (신성을 품고) 천지자연의 조화에 맞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유교의 중용(中庸)과 같은 가르침일 것이다.
영세불망 만사지, 이런 삶의 이치를 영원히 잊지 않고 살아가면 모든 것에 통한다는 것이다.
이 주문은 원시인들의 신화적 삶의 원리가 문명인의 삶의 원리로 변주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삼라만상을 가만히 살펴보면 다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풀씨 하나가 싹을 틔울 때도 온 우주가 함께 한다.
풀씨는 자연스레 그렇게 살아가지만, 인간은 ‘자아(ego)’가 있어 의식적으로 자아를 잠재우지 않으면 자아 중심으로 살아가기 쉽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살아가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자아가 이끌어가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자아는 ‘나’라는 생각일 뿐이어서, 우리가 ‘어떤 한 생각’에 빠지면 다른 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자아를 넘어서는 삶을 의식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현대 문명이 아슬아슬한 것은 자아 중심의 문명이기 때문이다.
현대 문명은 인간의 자아를 마구 부추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사는 지역, 직장, 직함 등에 목을 맨다.
현대 문명의 절체절명의 위기, 기후 위기 등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결국엔 ‘자아 중심의 의식’이 있다.
자아를 넘어서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가야만 하는 길을 찾아가야 한다.
소명이다. 원시인이 태양의 힘으로 사냥을 하듯, 우리는 어떤 거룩한 힘, 자기(self)가 이끌어가는 길을 가야 한다.
나는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거기 별들이 글을 쓴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건
나 역시 글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풀어쓴다.
- 옥타비오 파스, <친교(親交)> 부분
인간은 글을 쓴다. 별까지 비친다. 별들이 글을 쓴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풀어쓴다.’
삼라만상은 늘 ‘친교(親交)’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