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아이의 거울
자식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나 무엇이든지 손에 넣을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 장 자크 루소
인터넷에서 ‘소변 보고 도망간 초등생... 부모는 사과 대신 욕설’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건물 복도에 소변을 보고 도망간 초등생 부모가 사과는 커녕 욕설을 내뱉으며 적반하장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그 기사에 대한 댓글들도 함께 분노하고 있다.
‘아이들의 잘못은 십중팔구 그 부모 탓이다.’
‘문제아 뒤엔 끔찍한 문제부모. 저절로 문제아가 생기진 않지.’
‘교사가 아이가 이상해서 부모를 만나 보면 부모는 더 이상하더라는 말이 생각 나네.’
이 사건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하는 공동체 사회가 붕괴하고 있다는 여실한 증거일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엔, 다들 가장 두려워하는 게 있었다. ‘공동체의 가치’ 그게 무엇인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다들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살았다.
마을 어른들은 최고 규범의 상징이었다. ‘무서운 어른’ 왕도 한 시대의 어른을 두려워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도 산골짜기에 은거하고 있는 어진 선비의 상소를 무시할 수 없었다.
강고한 공동체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옛날의 공동체 사회는 남존여비의 가부장 사회였다.
하지만 우리는 공동체 사회의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차마 어기지 못하는 규범’이 우리의 행동을 규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쩌다 ‘감히 어기지 못하는 것’이 사라져버렸을까? 건물 내에서 소변을 본 자식을 두둔하는 부모가 탄생한 것일까?
조선 말기 이후의 우리의 역사는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한 어두운 역사였다.
그러다 경제 발전과정에서 산업화가 압축 성장을 하게 되면서 농촌공동체가 급격히 붕괴하게 되었다.
도시는 익명의 사회다. 누가 누구인지 모른다. 공동체 사회에서는 잘못한 행동은 끝까지 따라다닌다.
항상 자신의 행동을 살펴보아야 했다. 하지만 익명 사회에서는 법만 어기지 않으면 된다.
우리가 하나임을 뜨겁게 확인했던 ‘월드 컵’ 때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있어도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질서가 있었다.
하지만 여름휴가 때 관광지에 구름떼처럼 몰려 온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를 산처럼 남기고 간다.
서로 남이니까, 서로 모르는 사람이니까, 부끄러운 행동들을 서슴없이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되니 당연한 행동이 되어버린다.
‘월드 컵’ 때와 지금은 왜 이렇게 다른가? 각자 모래알처럼 흩어져 살아가기 때문이다.
‘IMF’가 터지고, 신자유주의의 해일이 몰려오면서 다들 각자도생의 생존법을 익혔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체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파렴치한 부모들’은 우리의 맨 얼굴이다.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다들 자식을 ‘강자’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가?
하지만 난파하고 있는 배에서 강자라고 살아남을 수 있는가? 지역사회 곳곳에 많은 공동체 단체들이 생겨나고 있다.
이런 작은 희망들이 모여 큰 희망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인간’을 향한 큰 물줄기를 형성해 갈 것이다.
맑은 시냇가의 물소리처럼 그렇게 에미되어
사막에서 꽃피우듯 그렇게 에미되어 바라만 보아라
- 박라연, <신은 내게 말했다> 부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천륜이라고 한다. 자식은 우리의 윤회다.
우리는 자식에게서 우리의 영겁의 미래를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