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장

by 고석근

완장


너의 생각의 사슬들을 부수어라, 그러면 몸의 사슬들도 끊게 될 것이다. - 리처드 바크



오래 전에 산사에서 잠시 지낼 때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도무지 그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소리 나는 곳으로 가 보았다.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모여 떠들고 있었다.


나는 불 같이 화를 냈다. “나, 고등학교 교사인데, 너희들 이렇게 절에서 밤에 떠들어도 돼?”


아이들은 고개를 수그리고 내 훈계를 다소곳이 듣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만 다들 일어나 자러가라고 말하며 훈계를 끝냈다.


지금 같으면 아이들이 그렇게 다소곳이 내 말을 듣고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모골이 송연하다.


나의 말은 다 맞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절에 오게 되었을까?


아이들의 상황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어떤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 이런 사람이 꼰대다.


바로 ‘완장’이다. 내가 그 당시 고등학교 교사나 어른이 아니었더라면 훈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때 얼마나 막막한가! 갑자기 벽 앞에 선 기분이 된다.


공자는 일찍이 말했다. “시를 모르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벽 앞에 마주 선 것과 같다.”


시는 기존의 언어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사유방식에서 나온다. 기존의 언어는 이 세상의 질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언어의 내용이 아니라 형식 자체가 이미 기존의 질서인 것이다. ‘한밤중’ ‘소란’ ‘교사’ ‘학생’ 이런 단어들이 스스로 자기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 언어를 쓰는 우리는 허깨비들이다. 언어만이 실재한다. 이 세상은 언어들의 춤판이다.


‘시(詩)’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언어의 노예다. 우리는 멀쩡하던 사람이 완장을 차면 갑자기 완장이 되어버리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런 사람은 시를 몰라 그렇게 된다. 세상이 쓰는 언어를 자신만의 언어로 바꾸어 쓸 줄을 몰라서 그렇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 자체다. 어릴 적 학교에서는 단어 풀이 숙제를 내주었다. 나는 ㄷ 전과를 보며 숙제를 했다.

이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품은 적이 없다. 당연히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를 익혀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다 시를 공부하며 언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언어를 그대로 쓰면 안 된다!


그래서 신념이 강한 사람이 가장 문제다.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은 너무나 위험하다. 이런 사람은 ‘인생은 연극(셰익스피어)’이라는 걸 모른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는다. 아들, 딸, 학생, 어떤 직업인...... . 그 역할에 맞는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런데 신념이 강한 사람은 그 가면을 자신의 진짜 얼굴로 생각한다. 역할에 불과한 완장을 자신의 팔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가면, 완장에 맞지 않는 자신의 욕망들은 자신의 깊은 마음속에 숨겨 놓는다.


그들의 얼굴 표정은 항상 딱딱하게 굳어 있다. 솟구쳐 올라오는 욕망을 억누르다 보니 그런 얼굴가죽이 되었다.

그 굳은 표피를 뚫고 욕망의 용암이 터져 나올 때가 있다. 그의 자아가 한순간에 허물어져 내린다.


30대 중반 어느 날, 나는 집과 직장의 울타리 밖으로 줄달음을 쳤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수십 년이 걸렸다.

나는 이제 한 생명체로서, 한 인간으로서, 나의 한 생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다. 짐승들처럼 서서히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고 싶다.



때로는 짐승처럼 울부짖고

때로는 아기처럼 보채네.

때로는 다 낡은 초가지붕을

들들 볶으며 못 살게 굴더니

해질녘에 찾아든 나그네처럼

우리 집 들창을 탁탁탁 두드리네.


- 알렉산드라 푸쉬킨, <겨울 저녁> 부분



시인은 ‘겨울 저녁’에 회오리바람과 눈보라와 노닐고 있다.


오랫동안 사람과 사람도 그렇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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