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과 하느님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길 수 없다. - 예수
인간이 끝내 타락하지 않는 이유는 아이가 계속 태어나고 어른은 계속 죽기 때문이라고 한다.
잔인한 말이지만 참으로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하 통일을 한 진시황은 죽기 싫었나 보다.
신하들에게 불로초를 찾아오게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고 순행을 하다 마차 안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만일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해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그는 과연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도 불로초를 구해 불사의 인간이 되었을 텐데,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곤충기’를 쓴 장 앙리 파브르는 말했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아니 모든 생명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세상은 온통 죽음으로 뒤덮일 것이다.”
현대사회는 인간의 오감 중에서 시각을 가장 중시한다. 눈에 보이는 물질을 가장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여서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하잘 것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은 눈에 보이는 물질이면서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
이 기는 천지자연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을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면 나와 우주가 하나임을 느낄 수 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밀 하나를 알려 줄게. 아주 간단한 건데, 마음으로 봐야 잘 보인다는 거야.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예수는 말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재물을 섬겼던 진시황과 하느님을 섬겼던 예수. 두 사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게 인간의 삶일 것이다.
왜 그럴까?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항상 재물을 접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쉽게 재물에 마음이 갈 것이다.
하느님을 보려면 애써 마음으로 보아야 하니,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에 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시황의 실패를 과학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과학이 죽음의 비밀을 발견하지 않을까?
재물을 한번 섬기기 시작하면 재물욕은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과 몸이 재물이 주는 온갖 쾌락에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철학자 칸트는 재물을 섬기기 시작하는 근대 자본주의의 인간에 대한 희망을 인간의 마음에서 찾았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지식을 탐구하는 순수이성, 선을 행하는 실천이성으로 나누고 이 두 이성을 ‘아름다움을 아는 마음’이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타고나기를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추한 것을 싫어한다. 생명체가 갖는 가장 기본적인 생존 본능일 것이다.
칸트는 이 마음의 힘을 길러 지적이면서도 도덕적인 인간이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감당하기 벅찬 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 기형도, <노인들> 부분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사람들은 ‘오래 사는 게 복이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아름다움을 잃은 노인은 추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