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물치지(格物致知)
인간은 행복조차 배워야 하는 짐승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중고등학교 다닐 때, 사회시간에 빵을 먹으면 얼마만큼 효용이 있는가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다.
빵 한 개를 먹을 때는 효용이 얼마, 두 개째는 조금 줄어서 얼마, 세 개째는 더 줄어서 얼마... 이런 식으로 계산을 했다.
좀 의아하기는 했지만, 교과서에 있는 거니까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언뜻 생각해보면 삶에 꼭 필요한 공부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빵을 살 때 어느 것을 살 것인가? 건전한 소비 생활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주지 않겠는가?
경제활동에도 ‘객관적인 잣대’가 있다고 생각해서 나온 학문이 경제학이다. 진리는 시공을 초월한 객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격물치지, ‘사물(物)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이치를 탐구(格)하여 앎(知)에 이른다(致)’는 것이다.
이러한 공부 방법은 근대에 등장했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삼라만상의 객관적 이치를 알아야 그 이치를 이용해 인간이 좀 더 윤택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객관적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 과학이다. 모든 학문은 과학이 되었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 등.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모든 식생활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를 따지는 공부가 ‘인간의 행복에 정말 기여하는가?’이다.
효용은 쾌락을 말한다. 밥 한 공기, 빵 한 조각, 음료수 등을 쾌락의 수치로 정리해 놓으면 행복한 소비생활에 정말 도움이 되는가?
이러한 효용 가치를 높이기 위해 인간은 자연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생산물들이 인간의 효용을 높일 테니까.
자연과학은 눈부시게 발전을 했다. 과학과 기술이 결합하여 지구 곳곳이 마구 개발되었다.
그 결과 기후위기가 왔다. 인간의 효용가치를 높이자고 한 행위들이 인류를 생존마저 위협하는 상황에 처하게 했다.
인간의 행복은 쾌락에서 오는가? 소위 과학이라고 하는 학문들은 인간의 행복을 쾌락이라고 단정 짓고 이론을 전개한다.
행복은 영어로 happiness이다. happiness는 일어나다(Happen)에서 유래되었다. 행복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쾌락은 밖에서 주어지는 즐거움을 주는 자극, 쾌감이다. 당연히 기분이 좋다. 행복한 것 같다.
하지만, 뒤이어 쾌감의 크기만큼 불쾌감이 온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 쾌감이 오지만 그 쾌감만큼 뒤이어 불쾌감이 온다.
진정한 행복은 밖에서 주어지는 자극이 아니라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다. 희열(Bliss), 황홀(ecstasy)이다.
이런 것들은 단순한 물질적 자극으로는 오지 않는다. 소위 내공을 쌓아야 온다.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한다.
이러한 마음공부에 중심을 둔 사람이 중국 명나라의 유학자 왕양명이다. 그는 격물치지에서, 물(物)을 사건으로 해석했다.
사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들은 사건이다. 갑자기 비라는 물질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은 ‘폭우’라는 사건이 아닌가?
곰곰이 따져보면 물질은 다 사건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왕양명은 이 사건들을 바로는 잡는 것을 격(格)이라고 했다.
따라서 격물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사건을 바로잡는 것이 된다. 어떻게 바로잡나? 바로 우리의 ‘양지(良知)’로 바로잡는다.
양지는 인간의 ‘타고난 지혜’를 말한다. 인간은 배우지 않아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척 보면 알 수 있는 능력, 그게 바로 양지다.
크게 보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 공자가 말하는 본성,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로고스다.
마주치는 사건들을 양지로 바로 잡으며 살아가면, 우리의 마음이 양지(知)에 이르게(致), (점점 깨어나게) 된다.
점차 지혜의 마음이 환해질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해질 것이다. 현대양자물리학에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우리의 눈이 봐야 물질이 나타난다고 한다. 관찰자 효과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물질의 객관적 진리라고 믿었던 것들은 다 허상이 된다.
실은 에너지의 장(場)인 삼라만상은 우리의 마음과 함께 어우러지며 생성 소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와 함께 영원한 춤을 추는 것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야
가령 새털구름으로 이루어진 집의 육체 같은 것 말야
모든 삶의 영광과 환희는 너무도 가벼우므로
휘발유처럼 쉽게 뭉쳐져 비로 사라진다
결국, 내 육체는 무거운 생의 나비를 발견하는 일에 다름 아니니
어찌하랴,
내 마음의 푸른 관심들 속엔
공허한 진눈깨비들의 가벼운 유영으로 가득차 버렸으니
한없이 달콤한 가난의 내 사랑,
- 박용하, <육체는 가난하다> 부분
시인은 ‘새털구름으로 이루어진 집의 육체’를 갖게 되었다.
예수가 물 위를 걷고 달마가 갈잎을 타고 양쯔강을 건넌 마음의 경지다.
우리 모두가 도달해야 할 ‘한없이 달콤한 가난의 내 사랑’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