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자정리(會者定離)

by 고석근

회자정리(會者定離)


전적인 삶을 산 사람은 죽음을 축하하며 반길 것이다. 그 죽음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마지막 도전으로 그에게 왔기 때문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회자정리, 만나면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가끔 생각하게 되는 사자성어다.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하나? 나의 장례식을 생각하게 되고, 남은 사람들도 생각하게 된다.


가슴에 얹혀 있는 생각 덩어리가 하나 있다. ‘언제까지 강의를 하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앞으로 5년은 하겠지요.”


그 5년이 거의 다가왔다. 그 5년은 계속 이어지는 걸까? 언제까지? 어젯밤 강의시간에는 같이 나이 들어가는 제자들을 보며, 마음이 안쓰러워졌다.


우연히 성인 대상의 강의를 하게 되었다. 농사를 지으며 살자! 무작정 내려간, 귀농이었다.


소꿉놀이 하듯이 농사를 지으며 한가하게 지내던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ㅇ 국회의원의 측근 ㄱ이 놀러왔다.


원두막에서 기분 좋게 서로의 술잔을 부딪치는데, ㄱ이 말했다. “ㅇ 의원이 문화센터를 만들었는데, 강의를 해줄 수 있겠어요?”


그렇게 해서 시작된 강의였다. 첫 강의하던 날, 20여명의 성인들의 눈빛과 나의 눈빛이 마주치며 나는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어떤 뜨거움을 느꼈다.


처음이었다. 그 불씨가 나날이 커졌다. 복지관으로, 시민단체로, 도서관으로, 학교로 퍼져나갔다.


올해가 강의를 한지 26년째다. 다양한 분들을 만났다. 특히 여자 수강생들이 많아 ‘여성’을 알게 된 것 같다.


아내가 가끔 말했다. “자기는 남자 형제들만 있는 가정에서 자라나 여성을 신비롭게 보는 경향이 있어.”


여성들을 많이 만나며 내 안의 ‘아니마’가 많이 깨어난 듯하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반대의 성이 있다.


남자에게는 아니마, 여성이 있고, 여성에게는 아니무스, 남성이 있다. 깊은 마음속의 반대의 성이 깨어나야 온전한 인간이 된다.


내 안의 여성이 깨어나 까칠하던 나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맑아졌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는 말했다. “접속하라! 창조하라!” 인간은 다른 존재와 접속함으로써 자신을 무한히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타고는 본질은 없다. 무한한 생성, 변화가 있을 뿐이다. 많은 제자들을 만나며 나는 나를 계속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었다.


오랜 방황을 그분들과 함께 했다. 그분들과 함께 길을 찾지 않았다면, 나는 나의 길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50대 초반에 큰 병을 앓을 때, 모든 강의가 중단되었었다. 나는 밥만 먹으면 뒷산에 올라갔다.


돗자리를 펴고 요가를 했다. 서러워 눈물이 글썽이다 뺨으로 흘러내렸다. 종잇장처럼 가냘픈 몸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이렇게 죽어가는 건가?’


준비되지 않은 이별은 견딜 수가 없었다. 다행히 조금씩 운신할 수 있게 되며, 세달 후 강의를 재개했다.


강의를 하다 밖으로 나와 긴 의자에 드러누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 일어설 수가 없었다. 한참 후 택시를 불러 집으로 왔다.


차츰 건강을 회복해가며 강의도 하고 글도 쓰게 되었다. 이제 지상에서 맺은 인연들을 놓아야 할 때가 다가온다.


인간에게 죽음은 얼마나 처참한 것인가? 다른 동물들은 죽음이 없다. 아니, 죽음을 모른다.


자신이 죽는 줄 알고 죽어야 하는 인간의 운명, 인문학을 공부한 나는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받고 담담히 말했다.


“... 오르페우스와 무사에우스와 헤시오드와 호머를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누가 이를 마다하겠습니까?... 저 자신 또한 불의한 재판으로 죽음의 고통을 겪었던 팔라메데스와 텔라몬의 아들 아작스와 다른 많은 옛날의 영웅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픈 깊은 열망이 있습니다... 저는 죽으러, 여러분들은 집으로 갑니다. 어느 길이 더 좋은지는 오직 신만이 아십니다.”


오직 신만이 아는 죽음의 세계. 나는 그 세계에는 먼저 간 멋진 영혼들이 다 살아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승에 있을 때처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바람처럼, 햇살처럼, 물처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머리로는 생사의 비밀을 알 것 같은데, 막상 죽음이 왔을 때, 내 몸이 소크라테스처럼 멋지게 죽음을 받아들을 수 있을까?



그 동안 나는 밝은 곳만 찾아왔지요 더 이상 밝은 곳을 찾지 않았을 때 내 마음은 갑자기 밝아졌습니다 온갖 새소리, 짐승 우짖는 소리 들려 나는 잠을 깼습니다 당신은 언제 이곳에 들어오셨습니까


- 이성복, <만남> 부분



‘온갖 새소리, 짐승 우짖는 소리 들려 나는 잠을 깼습니다’ 시인은 여래(如來)를 만난 것이다.


여래, 오는 것처럼.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한 해가 가고 다시 오는 것처럼.


이 만남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면, 아니 간직한다는 마음마저 잊고 간직할 수 있으면, 우리는 멋진 이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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