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외지심(敬畏之心)

by 고석근

경외지심(敬畏之心)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 - 공자



신화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그의 저서 ‘성(聖)과 속(俗)’에서 원시인들은 자신이 정주할 곳을 정할 때 신의 뜻에 따른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가축으로 기르던 황소를 풀어놓고 수일 후 황소를 수색하여 황소가 발견된 자리에서 황소를 희생재물로 바친다고 한다.


그 후 그 곳에 재단을 세우고, 재단을 에워싸고서 마을이 형성된다고 한다. 동물에 의해 장소의 신성성이 계시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룩한 것 속에서 살고자 하는 종교적 인간의 욕망은 실제에 있어서 순수한 주관적인 경험의 영속적인 상대성에 의해 마비당하지 않음은 물론, 객관적인 실재 속에 거주지를 잡고, 환상이 아닌 현실적이고 유효한 세계 속에 살려는 욕망에 해당한다.”


원시인들의 삶은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하나로 어우러졌다는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거룩하게 살아야 가장 현실적인 삶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황소가 머무는 곳은 인간이 살기에도 가장 살기 좋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처럼 과학적으로만 생각하여 삶터를 정하면, 비현실적인 판단을 할 수가 있다.


원시인들은 동물의 ‘원초적 감각’을 믿었던 것이다. 만일 실리만 추구한다면 어차피 자신의 경험으로 판단할 텐데, 경험에 한정된 판단이 어찌 지혜로울 수 있겠는가?


성스러운 삶을 살았던 원시시대는 농경을 하고 철기가 등장하면서 인류사에서 퇴장하기 시작했다.


신화시대가 끝나고 철학, 종교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철학, 종교 시대의 성현들은 한결같이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라!’고 가르쳤다.


인간은 자아(自我 ego)가 있어, 자아가 무한히 팽창할 수 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동물들은 본능의 지배를 받기에 탐욕이 제어가 된다. 배가 부르면 더 이상 먹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자아는 자신의 탐욕을 끝없이 추구한다. 이 자아가 동물의 본능과 결합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다른 생명을 먹어야 살아가는 생명의 본능이 나만 생각하는 탐욕과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다른 생명들을 마구 죽이고 자연을 마구 파헤치게 된다. 인간의 자아를 제어하지 않으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탐욕만 추구한다.


그래서 성현들은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라고 가르친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는 본성(本性)이 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진선미(眞善美)를 아는 타고난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야 자아가 제어가 된다.


원시인은 삼라만상을 거룩하게 보았기에 함부로 하지 않았다. 자아가 자연스레 통제가 되었다.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는 현대문명인은 가장 무서운 괴물이 된다. 과학의 이름으로 신성성을 상실하게 된 삼라만상은 인간의 탐욕의 대상일 뿐이다.


코로나 19가 전 인류를 위험에 빠뜨렸는데도 현대문명인은 두려워할 줄 모른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할 때까지 오만할 것이다.


수만 년의 현생인류의 역사 전체로 보면 문명시대는 얼마 되지 않는다. 농경이 시작된 지는 1만년도 되지 않고, 산업혁명은 2,3백년 밖에 되지 않는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뻐기며 살아가는 인간괴물은 최근에 등장했다. 현대문명인은 인류가 오랫동안 간직했던 경외지심,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회복할 수 있을까?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그 자리에서

힘껏 가지를 펴고

허락된 높이까지

온 힘을 다해 뻗어 오르려 한다

그런 나무를

나는 다정한 벗처럼 여긴다


- 호시노 토미히로, <동백나무> 부분



인간은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그 자리’를 알기 위해 한평생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허락된 높이까지/ 온 힘을 다해 뻗어’ 올라갈 수 있고, 서로 ‘다정한 벗’이 되어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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