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일여(生死一如)

by 고석근

생사일여(生死一如)


삶은 즐겁다. 죽음은 평화롭다. 골칫거리는 바로 그 중간과정이다. - 아이작 아시모프



노인들이 헤어질 때 흔히 하는 인사말, “안 보이면 간 줄 알아!” 서로 씩 웃으며 각자의 길을 간다.


젊을 때는 무심코 지나가던 ‘죽음’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주 가까이 다가온다. 이제는 항상 근처에서 어른거린다.


동물들은 죽음을 모른다. 평소에 보이던 동물이 안 보이게 되면, 어디에 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 보이는군!’ 사실대로 받아들인다. 도의 경지다. 썩은 동물을 봐도, “음, 못 먹겠군!” 훌훌 떨치고 떠난다.


생사 앞에서 담담하다. 그래서 동물들은 일생을 평온하게 살다간다. 인간만이 생사 앞에서 요란을 떤다.


살아도 죽음의 먹구름을 이고 사는 인간은 신이 나지 않는다. 신명나게 살 때는, 죽음을 모르는 어린 시절뿐이다.


나이 서른이 넘으면 사는 게 시들해진다. 어떻게 하면 다시 아이 때처럼 신나게 살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어떨 때는 너무 황홀하기 때문에 자살할 수도 있거든.”하고 말했다.


황홀한 순간, 인간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아!”


황홀의 영어 단어 엑스터시(ecstacy)는 그리스어 ‘엑스타시스(Ecstasis)- 자신의 밖에 서다’에서 왔다고 한다.


황홀한 순간, 우리는 자신을 벗어난다. 나와 다른 존재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삼라만상이 하나가 된다.

이 순간에는 생사일여다.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다’ 비로소 죽음을 깔끔하게 벗어난다.


죽음을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삶에서도 벗어난다. 삶과 죽음은 원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삶이 없다면 죽음도 없다. 따라서 죽음이 사라지면, 삶도 사라진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인간의 몸은 물질이기에 삶과 죽음을 겪게 된다. 하지만 몸은 동시에 에너지장이다. 에너지의 장은 태어남도 사라짐도 없다.


인간은 자아가 있어, 자신을 의식한다. 자신을 의식하기에 자신의 몸이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동물은 자신의 몸이 실재한다는 생각이 없기에, 삶과 죽음이 구별되지 않는다. 인간도 생각을 멈추면,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된다.


생각을 멈추는 것, 명상의 세계에 들어가면 우리는 느낀다. 은은히 존재하는 자신을.


그러다 언뜻 본다. 삶과 죽음의 굴레 속에 있지 않은 자신을. 이 순간이 황홀이다. 이때 우리는 실제의 세상, 실재계(實在界)를 본다.


이 순간은 영원이다. 세상의 시간 속에 있지 않다. 이 순간은 누구나 큰 사고를 당하거나, 큰 병에 걸렸을 때 언뜻 경험한다.


예수는 도마복음에서 말했다. “살아있는 동안 영생하라!” 불교에서는 ‘자신의 몸이 실재한다는 허상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현대인들은 마약을 한다. 마약 이름이 엑스터시(ecstacy)다. 현대인들은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현대문명 이전의 사회에서는 인간은 일상에서 황홀을 체험하면서 살았다. 원시인들은 집단적 의례를 통해 황홀경에 들어갔다.


그 뒤 인간은 종교에 의해 황홀경에 들어갔었다. 신이 죽은 세상에서 현대인은 황홀경을 갈구한다.


그런데 황홀경은 위험할 수 있다. 온갖 사이비 종교들과 마약류들이 현대인들을 병적인 황홀경에 들어가게 한다.



어디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음으로

여름이 가버린 걸 알 수 있듯

아, 그렇게

죽음이 시체를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도 속에서 질겨지는 시체들을.


- 황인숙, <가을날> 부분



가을엔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하지만 낙엽에서는 시체 냄새가 나지 않는다.


어쩌다 인간은 ‘애도 속에서 질겨지는 시체들을.’ 남기게 되었을까?


티베트에서는 시체들을 들판에 던져놓아, 독수리들이 깔끔하게 먹어버리게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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