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록지마(爲鹿指馬)

by 고석근

위록지마(爲鹿指馬)


참되고 바른 견해는 진실로 옳다 하고 그르다 하는 그 가운데에 있다. - 연암 박지원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순행지에서 병으로 죽게 되자, 환관 조고는 진시황의 유지를 숨긴 채 태자 부소 대신 후궁 소생의 어린 호해를 2세 황제로 등극하게 했다.


조고는 황제가 되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시험하기 위해 2세 황제에게 사슴을 바치며 말했다.


“폐하, 저것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폐하를 위해 구했습니다.” 2세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승상은 농담도 심하시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하니 무슨 소리요?”


2세 황제는 신하들을 둘러보았다. 목숨을 걸고 직언하는 신하들은 죽임을 당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위록지마, 사슴을 말이라고 우겨도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기막힌 상황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진실을 무엇인가? 사슴을 사슴이라고 말하고 말을 말이라고 말하는 게 진실인가?


김춘수 시인은 그의 시 ‘꽃’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사슴과 말도 마찬가지다. 그 동물들은 애초에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들을 ‘사슴’ ‘말’이라고 이름을 부르자, 비로소 그들은 사슴과 말이 된 것이다.


중요한 건, 진실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 ‘사슴’ ‘말’이라고 하는 말은 권력을 드러내는 글자일 뿐이었다.


우리는 ‘위록지마’에서 권력을 보아야 한다. 그 당시 조정에 모여 있던 황제, 대신들은 다 막강한 정치 권력자들이었다.


‘위록지마’를 진실과 거짓의 문제로 볼 때와 권력의 문제로 볼 때는 상당히 다르게 보일 것이다.


지금도 억울해하는 정치 권력자들을 많이 본다. 여전히 부활하고 있는 ‘조고들’에게서 핍박을 당하고 있는 권력자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동정은 할지언정 지지는 하지 않는다. 왜? 그들은 일반 국민들보다는 훨씬 많은 기득권을 누리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사슴을 사슴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내세우며 진실의 수호자를 자처한다.


국민들 눈에는 며느리를 핍박하는 시어머니나 곁에서 말리는 시누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중요한 건, 정치 권력자들은 ‘국민의 머슴’이라는 것이다. 국민의 머슴으로서 얼마나 충실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했느냐다.


언론을 통해, 법정 다툼에서 진실과 거짓의 싸움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그 싸움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싸움에서 정치의 본질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헌법 1조 2항에서 정치의 본질을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최고 권력자 조고는 사슴을 말이라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의 언어규칙을 깨고 새로운 언어규칙을 제시한 것이다.


이게 최고 권력자의 자세다. 지금의 최고 권력자는 국민이다. 우리는 현재 쓰고 있는 언어규칙을 깨고 새로운 언어규칙을 세울 수 있는가?


기존의 언어규칙에만 매달린다면, 우리는 진실과 거짓의 싸움으로 둔갑한 권력투쟁의 장에서 바깥으로 밀려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최고 권력자 조고의 눈으로 세상만사를 바라본다면, 전혀 새로운 언어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최근의 화두는 ‘정의, 공정’이었다. 우리는 정의와 공정이라는 단어를 새로운 언어로 대체할 수 있는가?


대체할 수 없다면, 정의와 공정은 지금처럼 허공을 떠돌다가 바람결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강한 사람들이 모인 것보다

약한 사람들이 모인 게

진실에 가까운 느낌이 드네

행복이 모인 것보다

불행이 모인 게

사랑에 가까운 듯한 느낌이 드네.


- 토미히로 호시노, <국화> 부분



약한 사람들이 모이고, 불행이 모이면, 진실과 사랑은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이성과 논쟁으로 진실을 찾으려 한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 할 것이다. 진실은 삶 속에서 피어나는 꽃 같은 거니까.

keyword
이전 16화언어도단(言語道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