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도단(言語道斷)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울부짖는다. “하늘이시여!”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늘(天)은 오랫동안 동아시아에서 신이었다. 세상만사를 주관하는 신,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순자는 말했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 (순천자흥 역천자망 順天者興 逆天者亡).
그런데 중국의 황제들은 자신들을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라고 칭했다. 그들은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지배했다.
중국 변두리의 왕들은 천자의 명에 따라 자신들의 나라를 통치했다. 결국 하늘이 동아시아 전역을 지배했다.
천자들이 말 그대로 하늘의 뜻에 따라 선정을 베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천자에게 호소해야 하는가? 천자의 명을 집행하는 관료들에게 호소해야 하는가? 그러면 그들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자신들의 행위가 하늘의 뜻임을 강변할 줄 것이다.
중국 드라마 포청천을 보면서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저런 청백리는 얼마나 있었을까?
오히려 하늘의 뜻을 빙자해 백성들을 착취하는 황제, 왕, 관료들이 훨씬 많지 않았을까?
유교는 하늘의 뜻을 지상에 구현하는 데 목표를 둔다. 우주와 인간에 대한 얼마나 심오한 철학인가!
하지만, 그 현란한 철학이 결국에는 탐관오리들의 악행을 옹호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동서양의 역사에 도도히 흐르는 철학을 공부하며 생각한다. 이 모든 철학은 누구를 위한 철학인가?
같은 철학을 공부하고서 어떤 사람은 군자의 길을 걷고, 어떤 사람들은 탐관오리의 길을 걷는다.
그럼 철학은 무엇인가? 물과 같은 것인가? 같은 물일지라도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고 벌이 마시면 꿀이 되는.
중국의 선불교를 접하며, 언어도단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말의 길을 끊어버려라!’
인간은 언어로 사고를 한다. 언어를 끊어버리면, 기존의 사고가 멈춘다. 우리는 기존의 사고가 멈춘 자리에서 피어나는 언어를 낚아채야 한다.
그 언어들은 새로운 사고를 하게 할 것이다.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게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동학에서는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人乃天)’이라고 했다. 그동안 우리의 머리 위를 짓누르던 하늘이 갑자기 우리 자신이 되었다.
이런 사고는 언어가 끊어진 자리에서 꽃처럼 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 꽃은 곧 지고 사람은 여전히 하늘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글자를 처음 봤을 때, 누구나 가슴이 뜨겁게 뛰었을 것이다.
그 글자로 우리의 세계를 열어가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언어는 우리의 삶 자체다.
시(詩)는 언어가 끊어진 자리에서 피어난다. 찰나의 언어다. 번개처럼 세상을 환히 밝혔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원시인들의 언어는 시적이었다고 한다. 인류사에서 가장 인간다웠던 시대였을 것이다.
그 뒤 문명의 역사는 어떤가? 인간다운 세상인가? 화려한 물질문명에 가려진 인간의 구체적 삶은 어떤가?
많은 사람들이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나 더 나아지지 않는 세상에 대해 절망할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평가받는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삶의 매순간, 자신의 언어를 끊어야 할 것이다. 언어가 끊어진 자리에서 피어나는 언어들로 자신의 세계를 열어가야 할 것이다.
온다 뿜빠 뿜빠
나팔을 불며 도도히
한 낮의 아파트 광장으로 진입하고 있다
〔......〕
배추 사려, 배추요 열일곱 살 아가씨 엉덩이보다 싱싱한 배추!
나른하게 잠복하고 있던 공기군(空氣軍)이 마구 파도치고
나무들의 우듬지가 불타기 시작한다
어떤 시간의 우듬지가 불타기 시작한다
죄 없는 한 <시대>가
불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여인들은
행주치마를 두르고
시간의 연두빛 돌인,
포복한 저 배추들을 나르기 시작할 것이다
- 이경림, <저기, 한 혁명가가> 부분
시인은 배추장수혁명가가 아파트 단지에 침투해 혁명을 일으키는 장엄한 광경을 보여준다.
‘이제, 여인들은/ 행주치마를 두르고/ 시간의 연두빛 돌인,/ 포복한 저 배추들을 나르기 시작할 것이다’
저 여인들은 어떤 세상을 열어갈까? 그것은 우리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