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지도(中庸之道)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른 존재, 즉 전인(全人)은 ‘빈 배’와 같은 사람이다. - 장자
산에 가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산천초목이 우리에게도 중심을 잡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때문에, 마음이 쉬이 흐트러진다. 흐트러진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뒤죽박죽이다.
세상이 생지옥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마음을 가다듬으며 살아가야 한다. 마음의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것을 ‘중용지도’라고 한다.
중(中)은 우리가 마음을 고요히 가다듬을 때, 텅 빈 마음이 될 때 느껴진다. 우주의 중심과 맞닿는 마음의 상태가 된다.
항상 이 마음을 잃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 공자가 말하는 군자다. 우리가 가야 할 이상적인 인간의 길이다.
중국의 고전 ‘중용(中庸)’ 22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자기의 타고난 본성을 극진히 할 수 있다면 사람의 타고난 본성을 극진히 할 수 있다. 사람의 타고난 본성을 극진히 할 수 있으면 만물의 타고난 본성을 극진히 할 수 있다. 만물의 타고난 성질을 극진히 할 수 있으면 천지가 만물을 화육(化育)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도울 수 있다. 천지가 만물을 화육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도울 수 있다면 천지 즉 우주와 더불어 그 운동에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다.’
한 인간이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극진히 할 수 있다면, 사람의 타고난 본성을 극진히 할 수 있고, 결국에는 만물을 화육하는 천지의 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억울한 일을 많이 겪는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 억울한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한다.
중용은 억울한 일을 겪는 우리에게 말한다. “자신의 본성을 극진히 하라!” 그렇다 우리가 할 일은 항상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극진히 하는 것이다.
간음을 한 여인에게 돌멩이를 마구 던지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말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오랫동안 간음을 한 여인에게는 가혹했다. 가부장 사회라, 같은 죄를 지어도 남자에게는 관대하고 여자에게는 가혹했던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죄를 짓게 된다. 인간의 나약함과 인간 사회의 허약함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가혹한 응징을 하기 보다는 죄 지은 사람의 마음을 읽고 사랑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죄인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투사가 되어서 그렇다.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다. 그 어두운 그림자가 죄를 지은 사람을 발견하면, 사납게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은 아비규환의 세상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죄인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는 않은가?
죄인은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벌을 주는 손길에는 사랑이 스며있어야 한다.
사랑의 손길이 없는 가혹한 응징은 인간 세상을 생지옥으로 만들 것이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니까.
우리의 본성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진선미(眞善美)가 있다. 따라서 남의 잘못, 세상의 잘못이 훤히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눈은 밖을 보게 되어 있어서 자신의 잘못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보려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
바로 중심을 잡는 노력이다. 남들이 아무리 악한 행동을 하더라도 세상이 아무리 미쳐 돌아가더라도, 우리는 자신의 본성을 극진히 해야 한다.
한 인간이 중심을 잡으면 다른 사람들도 중심을 잡게 되어 있다. 결국엔 세상이 중심을 잡게 되어 있다.
현대 사회는 개인이 중요한 사회다. 전체주의, 집단주의를 거부하는 사회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심을 잡아가는 게 중요한 시대다.
바람은 기와지붕과
사방의 벽을 흔들고 있다
지구의 중심이 끌어당기고
빛이 붙잡고 있는
두 개의 초록색 병
- 유진 기유빅, <두 개의 빈 병> 부분
시인은 바람이 몹시 부는 날, 기와지붕과 사방의 벽이 흔들리는 것을 본다.
그러다 마구 흔들리며 중심을 잃지 않는 ‘두 개의 빈 병’을 발견한다.
자신을 텅 비웠기에 ‘지구의 중심이 끌어당기고/ 빛이 붙잡고 있는/ 두 개의 초록색 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