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즉재주(水即載舟)
시간은 인간이 쓰고 있는 모든 가면을 벗겨준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한 배우가 마약 투약 혐의로 긴급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는 취재진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저는 한 번도 마약을 한 적 없고 마약을 본 적도 없고 마약을 한 사람과 관계된 사람과 연결된 적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복용하는 건 신경안정제입니다.”
“저는 일반 배우에서 하루아침에 마약 배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거짓에 열광을 합니다... 내 삶이 언제까지일지 모르겠지만 이름을 걸고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나는 울분에 차 있는 그의 표정을 보며,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순자의 말을 떠올렸다.
“수즉재주 수즉복주 水即載舟 水即覆舟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또한 물은 배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이 말을 그 배우의 말에 빗대어 말하면, ‘대중은 거짓에 열광하지만, 또한 진실에 열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이 거짓에 열광할 때, 얼마나 절망적이겠는가! 겪어 본 사람은 누구나 극단적인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철인들이 대중을 믿지 않았다.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도 민주주의적 절차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얼마나 절망적이었을까? 하지만 그는 담담했다. 그는 오직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만 집중했다.
제자들이 돈을 모아 그를 해외로 피신시키려 했을 때, 그는 말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봤네, 그런데 내 안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더군.”
그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독배를 마시고 잠을 자듯이 죽어갔다. 그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그는 지금까지 인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대중은 거짓에도 열광하지만, 진실에도 열광한다네.”
우리는 지금까지 그의 진실에 열광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와 유사한 일이 벌어졌을 때, 대중은 똑같이 거짓에 열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인간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개미들의 의사소통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들은 항상 일사불란하게 최고의 일치된 의견을 찾아낸다.
한 개미가 길을 가다 비가 오리라는 예감이 들었다고 하자. 그는 즉각 페르몬을 발사한다.
“비가 올 것 같아!” 그 냄새가 퍼져나가며, 지나가던 개미들은 즉각 그 냄새에 반응한다.
이렇게 한 개미의 의견은 널리널리 퍼져나가며 전체 개미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진다고 한다.
우리는 길을 가다 가끔 본다. 긴 줄을 이으며 이사를 가는 개미들을. ‘아, 비가 내리려나 보다.’
그런데 인간의 나라에서는 이러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가 힘들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만일 전체 인류가 소크라테스처럼 내면의 소리를 듣고 산다면, 우리도 개미들처럼 일사불란한 의사소통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면의 소리보다 세상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세상의 소리는 얼마나 다양한가!
그러다보니 의사소통이 쉽게 되지 않는다. 한 개인이, 대중이, 거짓에 열광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배우의 진실은 대중이 알 수가 없다. 그의 진실은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밝혀질 것이다.
어쩌면 영영 진실은 묻혀 버릴지도 모른다. 얼마나 많은 한 맺힌 영혼들이 이 세상의 하늘을 떠돌고 있을까?
생각하는 동물로 진화한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우리는 이 숙명을 소중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도 개미들처럼 한순간에 합의점을 찾아내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우리 모두 소크라테스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인간을 믿지 않은 치들의 지도에 수많은 대중들이 따라가고 있는 것을 먼 발치로 바라보면 가슴 아프다
- 월트 휘트먼, <생각> 부분
우리는 쉽게 이런 장면을 목격한다. 얼마나 많은가! 조만간 거짓으로 밝혀질 대중의 지도자들이.
우리는 항상 우리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잘 들리지 않을지 모르나 차츰 선명해질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내면의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