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극합일(對極合一)

by 고석근

대극합일(對極合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야말로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지름길이다. - 카를 융



며칠 전에 산에 갔다가 “어이쿠!” 미끄러졌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일부러 이 사고를 불러왔다는 것을. 내 안의 깊은 무의식에는 ‘마조히즘(피학증)’이 있다.


나는 집에서 방문을 닫다가 뒤꿈치를 몇 번 까였다. 내 뒤에서 닫히는 문, 그 문이 내 뒤꿈치를 할퀴는 것이다.

그 문을 조정하는 내 손, 내 손을 조정하는 내 마음. 내 마음에 내가 나를 상하게 하는 어두운 힘이 있는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이 느끼는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이 감정이 과하다. 나의 타고난 예민한 성격 탓이다. 내 마음은 피해를 당할 때마다 분노를 했다.


하지만, 상대가 너무나 거대하지 않는가? 주인집 할머니, 이웃집 아저씨, 담임선생님, 부잣집 아이들... 나는 그들에게 향하는 분노의 에너지를 안으로 꼭꼭 숨겼다.


앞으로 안으로 깊이 들어간 분노의 에너지는 내 안에서 마구 몸부림을 쳤다. 차츰 그들에게 분노하기보다 나를 상하게 하는 게 더 편해졌다.


그러다 술에 취하면, 그 분노의 에너지가 밖으로 마구 분출했다. 나는 사디즘(가학증) 환자였다.


오래 전에 교직에 있을 때, ‘차라리 큰 병에 걸렸으면... .’하고 생각하다가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어느 날 충동적으로 사표를 내게 됐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창공을 마구 날아올랐다. ‘오! 자유다!’ 나는 이제 가학증 환자도, 피학증 환자도 아니었다.


그 둘이 하나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날았다. 공기는 상큼했다. 나는 온 몸으로 바람결을 타고 날아갔다.


대극합일, 서로 반대로 보이던 것들이 하나가 되는 찬란한 순간이었다. 오로지 환희의 꽃이 만발한 세계였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좌절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사람을 한 줄로 세우는 세상에서 어느 누가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키에르케고르)’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가는 젊은이들을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에게는 크게 두 가지의 본능이 있다고 말한다.


에로스(삶의 본능)와 타나토스(죽음의 본능)다. 우리 안에는 이 두 힘이 팽팽하게 맞서 있다.


언제 어느 하나의 힘이 우리를 마구 끌고 갈지 모른다. 사는 게 시들해진 한 주부가 있었다.


그녀는 그날도 평소처럼 근처의 마트에 다녀왔단다. 집에 와서 사온 식료품들을 냉장고에 가지런히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거실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놔 둔 채 베란다 창문으로 걸어가 밖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게 사람의 마음이다. 양쪽으로 갈라진 마음은 한순간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마음을 챙겨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고요히 살펴보아야 한다. 서로 반대편으로 갈려 와글거리는 마음이 하나로 어우러지게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고요히 들여다보게 되면 알게 된다. 파도치는 마음은 결국 큰 바다의 작디작은 일부라는 것을.


큰 바다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우리는 무사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어떤가?


우리의 마음을 항상 파도치게 하지 않는가? 온갖 번쩍거리는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마구 뒤흔들어놓지 않는가?


언제 우리 사회는 큰 바다 같은 마음을 갖게 될까? 고요한 거리를 평온한 얼굴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게 될까?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의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그저 그런 어떤 곳이.


- 김승희, <객석에 앉은 여자> 부분



많은 주부들이 어딘가 아프다고 호소한다.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그 많은 여자들이 이렇게 살지 않았으면, 지금 인류가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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