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착오(試行錯誤)

by 고석근

시행착오(試行錯誤)


모든 것은 생성되어 온 것이다. 즉 절대적 진리가 없듯이 ‘영원한 사실’도 없다. - 프리드리히 니체



어제 공부 모임에서는 현대 철학자 니체를 공부했다. 중학교 과학 교사인 회원이 말했다.


“니체는 절대적 진리가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진리의 기준을 삼아야 합니까?”


인간은 이치에 따라 살아간다. 이치 중에서도 참된 이치, 그게 진리다. 그 진리가 절대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무엇에 의거하여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공부하는 사람은 질문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하는 걸까?”


바로 근대 서양식 공부를 한 결과다. 근대 서양에서는 인간 이성 중심의 사상이 일어났다.


근대철학의 문을 연 사람은 르네 데카르트다. 그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하는 인간’은 당연히 자신을 주체로 생각한다. 밖에 보이는 것들은 객관, 대상이 된다.


객관, 대상을 탐구하고 지배하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근대인은 대상의 이치를 탐구하여 대상, 인간과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대상은 다 물질세계였다. 자연현상은 자연과학, 사회현상은 사회과학, 인간의 여러 현상은 인문과학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당연히 이치, 진리는 대상에서 찾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는 밖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니체가 절대적 진리가 없다고 하니, 커다란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아니? 그러면 진리가 도대체 무엇이야? 우리 삶의 기준이 없어지잖아!’


니체는 현대철학의 문을 연 사람이다. 근대의 ‘인간 이성 중심의 사고’를 넘어서는 철학을 연 사람이다.


그는 이성적 인간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인간의 ‘힘의 의지’를 인간의 중심에 놓은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은 생성되어 온 것’으로 본다. 진리도 생성되어 온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어떤 원시인들은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게 되면, 맨발을 앞으로 쭉 뻗어 중앙을 비우고 둥글게 앉는다고 한다.

그렇게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답을 찾아간다고 한다. 정답이 아니라 해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다보면, 본인들도 모르는 생각들이 무의식에서 툭 툭 튀어나오고 그 생각들이 서로 오가며 생각지도 않았던 창발적인 발상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일상에서 경험한다. 여러 사람이 모여 얘기하다 보면, 멋진 생각들이 나온다는 것을.


개인도 그렇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일단 해봐야 한다. 앉아서 생각하는 것으로는 멋진 답이 찾아지지 않는다.


진리는 시행착오에서 나온다. 우연적인 시행과 착오의 반복을 통해 새로운 진리가 생성되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살아가는 것이지. 진리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다.


옳고 고름은 누구나 척보면 안다. 어떤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이 마음을 끄집어내면 진리가 생성되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이 마음은 꽁꽁 숨겨 놓고,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 머리로만 진리를 탐구하였다.


그렇게 한 결과 물질세계에 대한 이해는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고양되었는가?


이 세상은 물질로 보이지만, 실은 에너지장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물질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시비지심을 깨워 세상을 보면, 우리는 진리의 꽃을 피우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근대의 눈’을 넘어서 ‘현대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아야 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


근대가 초래한 인류의 위기, 인간 소외, 기후 위기 등은 우리가 현대의 눈을 갖게 될 때 자연스레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그 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그 전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왜냐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 밀란 쿤데라, <시인이 된다는 것> 부분



인간은 누구나 원래 시인(원시인)이었다. 그러다 문명사회가 되면서 삶을 셈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삶이 ‘우스꽝스러울 정도/ 낮게 계산되어’ 버렸다.


극소수의 시인들만이 인간성을 보존하고 있다. 그들은 ‘행동의 끝까지/ 희망의 끝까지/ 열정의 끝까지/ 절망의 끝까지’ 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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