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제동(萬物齊同)

by 고석근

만물제동(萬物齊同)


태양이 바다를 젖가슴처럼 애무하는 것으로 보는 것. 그게 바로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사물을 안다는 것은 애무한다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은 어느 날 바닷가에 간다.


그는 물수제비를 뜨고 있던 아이들을 보고 자신도 물수제비를 뜨기 위해 매끈한 조약돌을 집어들다가 불쾌감을 느끼고 내려놓고 만다.


이후 그는 그 불쾌감을 ‘구토’라고 명명한다. ‘나는 토하고 싶었다. 그렇다. 그 때 부터 구토가 나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중얼거린다. ‘물체들은 유용한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을 만지는데, 이제 견딜 수 없이 느껴진다. 난 마치 살아 있는 짐승을 접촉하듯 그것들과 접촉하는 것이 두렵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쥐었던 느낌이 뚜렷하게 떠오른다... 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조약돌에서 내 손아귀로 전해지고 있었다.... 손안에 느껴지는 일종의 구토 증세였다.”

그는 왜 조약돌을 만지며 구토를 느꼈을까? 나는 어릴 적 조약돌을 많이 갖고 놀았다.


마을 앞에 냇가가 있어 자주 놀러갔었다. 모래밭에서 반짝이는 조약돌들. 감촉이 참 좋았다.


왜 그때 조약돌의 감촉이 좋았을까? 장자가 말하는 만물제동, 만물은 도(道)의 관점에서 본다면 등가(等價)이기에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조약돌은 가치가 같았던 것이다. ‘나는 인간, 그는 사물’ 이렇게 나눠지지 않았다.


내가 마냥 즐거운 아이여서 그랬을 것이다. 원시인들은 삼라만상이 살아있다고 생각했다.


모두 영혼이 있는 존재, 다 거룩한 존재였다. 세상을 나눠보지 않는 아이들도 이런 사고를 한다.


그러다 로캉탱처럼 어른이 되면, 인간과 사물을 나눠서 보게 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 사물은 죽은 존재.

그런데 대다수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 타성적으로 살아간다. 사물과 다들 바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로캉탱이 조약돌을 집어들다가 구토를 느낀 것도, 자신이 사물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인간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은 자신의 무의식 깊은 곳에 숨겨둔다. 그러다 남에게서 그런 점을 발견하게 되면, 구토를 느끼게 된다.


마음에 없는 것은 밖에 드러나지 않는다. 마음과 바깥의 풍경은 같은 것이다. 로캉탱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려 한다.


글을 쓸 때는 몰입이 된다. 사물을 벗어나 에너지장의 세계로 들어간다. 마냥 즐거운 아이가 된다.


글을 쓰는 것은, 오래된 우물의 물을 퍼내는 것이다. 자신의 지난날들의 아픔을 다 드러내는 것이다.


물을 다 퍼내고 나면 맑은 물이 솟아난다. 과거의 아름을 드러내고 나면 맑디맑은 마음이 드러난다.


그 마음은 우리의 몸 자체다. 몸은 언제나 춤추고 있다. 피가 돌고, 심장이 뛰고, 숨결이 나와 세상을 하나로 어우러지게 한다.


마음이 몸을 떠나게 되면, 우리 몸은 사물이 된다. 항상 잡다한 생각들에 끌려 다니는 몸, 세상이 시키는 말에 따라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몸, 사물이다.


로캉탱은 글쓰기를 통해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될 것이다. 마음과 하나가 된 몸은 사물을 만나도 사람을 만나도 항상 즐거울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사물은

각각 주인이 있어서

내 것이 아니면

터럭 하나라도 가질 수 없지만

오직 강가에 부는 맑은 바람과

산에 떠 있는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색이 된다네


- 소동파, <적벽부> 부분



인간은 어쩌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사물’들의 주인을 자처하게 되었을까?


모든 사물은 원래 ‘강가에 부는 맑은 바람’처럼 ‘산에 떠 있는 밝은 달’처럼 자유로운 존재일 텐데.


인간은 사물의 주인이 되면서 사물과 같아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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