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생만물(道生萬物)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노자는 말했다 “도가 만물을 낳았다. 도생만물 道生萬物.” 장자는 말했다. “길은 우리가 걸어가는 데서 완성된다. 도행지이성 道行之而成.”
언뜻 보면, 두 철인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듯하다. 노자의 말에서는, 도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을 낳았으니, 인간도 도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자유한 존재라는 느낌이 든다.
그에 반해 장자는 인간의 대자유(大自由)를 말한 듯이 보인다. 도라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걸어가면서 완성하는 것이니까.
우리가 물에 들어갔다고 생각해 보자. 어떻게 해야 자유로울까? 도는 내가 만드는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이렇게 생각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물에 빠져 죽게 될 것이다.
물은 도에서 나왔기에 물에 도가 있다. 어떤 원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원리에 맞춰야 물에서 자유로워진다.
헤엄치는 사람은 이 물의 도를 터득한 사람이다. 그는 물의 이치, 원리에 자신의 몸을 잘 맞추는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노자가 말하는 것과 장자가 말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가? 그들은 결국 도와 인간의 삶이 하나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의 학파로 묶어 도가(道家)라고 한다. 노신이 말한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도 이와 같다.
산에 가 보면 새로운 길이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시 길은 처음부터 있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이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왜 그 길을 갔을까? 잘 생각해 보면, 그 길이야말로 집단지성을 산물이다.
가끔 그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걸어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길이 되지 못했다.
아마 도에 맞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길을 가도 마음대로 가지 못한다. 저 위로 훌쩍 뛰어 오르고 싶어도 인간의 몸은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마음대로 길을 가는 것 같지만, 그 마음은 길의 이치, 원리를 잘 알고 있다. 이치, 원리에 어긋나면 사고가 난다.
그래서 명대의 유학자 왕양명은 ‘마음이 곧 이치다. 심즉리 心卽理.’라고 말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러면 많은 현자들이 대답한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사십시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온갖 쾌락을 찾아간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그들은 쾌락을 추구하며 살다 보면, 깊은 허무감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알아야 했다.
‘이건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따로 있다!’ 단호히 다른 것을 찾아나서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계속 세상이 주는 쾌락을 쫓아간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게 아니다. 새롭고 낯선 길이 두려워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에는 자신이 가야 할 도가 있다’는 것을.
풀밭에서 풀을 먹는 소를 보면, 소는 앞에 놓여있는 풀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뜯어먹는 것 같지만, 완전히 도에 맞춰 풀을 골라먹는다.
소가 좋아하는 것이 곧 소의 도인 것이다. 사람은 온갖 욕심에 오염되어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염되어 있는 마음을 맑게 하는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한다.
맑은 마음을 갖게 되면, 그리스의 소설가 카잔차키스처럼 말하게 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노자는 ‘도가 만물을 낳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도는 인간이 행하지 않으면 있으나마나한 것이 아닌가!
장자는 구체적 삶에서 도가 어떻게 구현되는 지를 말한 것이다. “길은 우리가 걸어가는 데서 완성된다.”
풀숲 여기저기 흩어진 돌들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내 마음대로
저 돌들을 치우고
잡초를 뽑을 수 없다는 것을
조용히 깨닫는다.
- 김영석, <버려둔 뜨락> 부분
시인은 ‘버려둔 뜨락’을 보며, 도를 본다.
‘도법자연(道法自然), 도는 자연(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