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록지마(爲鹿指馬)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천하를 통일하여 최초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진시황이 죽자, 환관 조고는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해 태자 부소와 승상 이사를 비롯한 많은 대신들을 죽이고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실권을 장악했지만, 불안한 조고는 자신을 반대하는 대신들을 가려내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어느 날 그는 사슴을 호해 황제에게 바치며 아뢰었다. “이것은 말(馬)이옵니다.” 이에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뭐요? 어찌 사슴(鹿)을 보고 말이라고 하오?
황제가 좌우의 대신들을 둘러보자, 조고의 눈치를 살피던 어떤 신하들은 사슴이라 대답했고, 어떤 신하들은 잘 모른다고 대답했고, 또 어떤 신하들은 사슴이라 대답했다.
그 뒤 조고는 사슴이라 대답한 신하들은 모함을 하여 처형했다. 이후 대신들은 조고를 두려워하여 조고의 말에 아무도 반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위록지마, 권력자가 사슴을 말이라고 하자 사슴이 말이 되어버리는 기적이 일어난다. 신의 천지창조와 버금가는 권능이다.
독재자는 영어로 dictator다.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독재자 조고가 말을 하자 다들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고의 말을 따라야 했다.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미셸 푸코는 ‘지식은 권력’이라고 했다. 사슴이라는 지식은 권력에 의해 사슴도 되고 말도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이 사슴을 말로 둔갑시켜왔다면,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골적인 정치권력과 달리 자본권력의 보이지 않는 손이 행하는 위록지마가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
한때 우리는 ‘침대는 과학’이라는 TV 광고를 많이 접했다. 침대가 과학이라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들 비유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광고하는 그 침대가 과학(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자신들도 모르게 그 침대를 파는 매장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TV는 권력자의 입이다.
보통 사람은 TV에서 말할 수 없다. 사람은 권력자의 말을 듣게 되어 있다. 이런 TV 광고도 있었다.
‘친구가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다.’ 잠시 후 TV 화면 가득 검은 고급 승용차 한 대가 나온다.
차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다 말해 준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가졌는가가 그 사람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지식들은 어떤 권력과 관계가 있는가?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이 최고다. ‘뭐니 뭐니 해도 머니다!’
자본가가 TV를 통해 하는 말이 우리의 지식이 된다. 과거에 왕의 말이 대신들을 통해 널리널리 퍼져갔듯이.
푸코는 ‘사람들이 자신의 상식을 스스로 확신하는 것은 자신의 이웃을 감금함으로써가 아니다’고 말했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과연 어떻게 상식이 되었는가? 이웃과 공유하는 것들이 상식이 된다.
‘침대가 과학’이고 ‘차가 안부의 대답’이 되는 게 아무런 심리적 저항도 없이 상식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다. 애초부터 존재라는 건, 없다. 빛이 있으라고 해야 빛이 생겨나고, 물이 있으라고 해야 물이 생겨난다.
무엇이 명품인가? 유명한 상품? 세상에 그런 건 없다. 권력자가 명품이라고 이름을 불러줘야 명품이 된다.
가능한 적은 말을
그래야 말 한마디 한마디는 울림통 속을
돌고 돌아
자신만의 메아리를 만들어내지.
넓은 공간 속에서 언어와 공동(空洞)은
서로 섞여들고.
언덕 너머 들릴 것만 같은 종소리,
그것도 한없이 느리게.
- 외젠 기유빅, <가능한 적은 말을> 부분
어느 선사는 설법 중 지저귀는 제비 소리를 듣고는 “실체에 관하여 이 얼마나 심오한 설법인가”라고 말하며 법상을 내려 왔다고 한다.
부처를 여래라고 한다. 여래(如來)는 같을 여(如)와 오다(來)가 합쳐진 말이다. 여래는 그렇게 온 사람이다.
‘제비가 지저귀는 것처럼’ 제비의 지저귐에는 어떤 지식도 권력도 없다. 그래서 제비의 지저귐은 우리의 텅 비어 있는 마음과 공명한다.
삼라만상은 이렇게 오고 가며 서로 만나 무수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우리는 ‘가능한 적은 말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