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승자강(自勝者强)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인간은 초극되어야만 하는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 프리드리히 니체
자승자강,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진정한 강자다. 그럼 남을 이기는 사람은? 노자는 ‘승인자유력(勝人者有力)’이라고 말한다.
남을 이기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남을 이기는 깡패를 힘이 있다고는 생각해도,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강한 사람은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신광이라는 수도승이 동굴에서 면벽 수도를 하고 있는 달마를 찾아갔다.
그는 달마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이 어리석은 중생을 제도해 주십시오!” 달마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돌아가라!”
신광은 자신의 왼팔을 칼로 잘라 달마에게 바쳤다. 달마가 말했다. “네가 구하려는 것이 무엇이냐?”
신광이 대답했다. “마음이 불안합니다.”
달마가 말했다. “불안한 마음을 내놓아라.”
하지만 신광은 마음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네 불안한 마음이 모두 없어졌느니라. 너는 보는가?”
이후 신광은 달마의 선(禪)을 잇는 선종의 2대 조사 혜가가 되었다.
불교에는 소를 찾아가는 이야기 ‘심우도(尋牛圖)’가 있다. 소는 마음이다. 처음에는 소의 자취도 찾기 힘들다.
나는 오랫동안 나의 마음을 모르고 살았다. 부모님 마음이 내 마음이었다. 어느 날, 눈앞에 천 길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마음이 나무나 괴로웠다. 팔을 잘라서라도 불안을 멈추고 싶은 혜가의 마음이었다. 공부하러 오는 분들이 가끔 말한다.
“공부를 괜히 했어요. 마음이 불안하게 되었어요.” 그렇다. 마음을 모르고 살다가 마음을 알고 나면 불안한 마음에 휩싸인다.
그렇다고 마음을 모르고 살 때는 편안했을까? 의식은 편안하다고 생각했겠지만, 무의식에서는 고해(苦海)였다.
그래서 부족한 게 없는 것 같았는데, 뭔가 허전하고 우울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찾아 나서면, 도무지 마음을 알 수가 없다.
겨우 소발자국을 발견하고서 발자국을 따라가 소를 발견하지만, 소는 마구 날뛴다. 데리고 갈 수가 없다.
마구 날뛰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스려야 한다. 나는 이 기간이 참으로 길었다. 느닷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시도 때도 없이 화가 폭발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따금 바다처럼 고요한 마음이 느껴졌다.
아직 나의 마음을 다스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 내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달마가 혜가에게 말한 ‘네 불안한 마음이 모두 없어졌느니라. 너는 보는가?’의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것 같다.
현대 철학의 아버지 니체는 인간의 정신의 변환을 세 단계로 설명했다. ‘낙타에서 사자로 마침내 아이로.’
낙타는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남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다 어느 날, 포효한다. 자신의 등에 이고 있는 짐을 다 던져버리고 사막을 나온다.
하지만 그는 힘은 있지만, 진정한 강자는 아니다. 자신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가 되어야 한다.
아이는 마냥 즐겁다. 희로애락의 파도를 탄다. 억울하면 화를 내고 그래도 안 되면 울음을 터뜨리고는 잠을 잔다.
그는 말갛게 깨어난다. 그는 언제나 부족함이 없다. 언제나 거기에 머무는 바다다. 천지자연이다.
동물은 자신의 본능대로 살아가기에 자신을 이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자아가 있어, 마음이 마구 요동친다.
그 마음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남을 해치든지 자신을 해치게 된다.
소를 길들인 소년은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 그는 자신의 소명을 다하게 될 것이다.
눈 속에서 괴로움 잊고 팔 끊어 구하니
마음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비로소 마음 편하구나.
- 두비, <전법보기(傳法寶記)> 부분
혜가는 ‘마음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비로소 마음’을 보았다.
현대 철학자 라캉도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생각하는 곳에 없고, 생각하지 않는 곳에 있다.”
나는 애초에 없는 거니까. 온 우주나 원래 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