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易地思之)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이들은 결코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나는 크게 아프고 나서 추위를 엄청 타게 되었다. 여름에도 보일러를 켜고 자야 하니 누가 이해를 하겠는가?
가장 큰 문제는 초청 강연이었다. 주최 측에서는 나를 위한답시고 에어컨을 빵빵 털었다.
여름 옷 안에 복대를 하고, 항상 겉옷을 갖고 다녔다. 그리고 앉아서 강연을 해야 했다.
의자를 준비해달라는 말을 하는 게 너무나 싫었다. 얼마 전에 등산을 하다가 발목을 삐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몸이 허약하니, 강연 전에 술을 마시고 갔다. 겨우 술기운으로 버티는데 어디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디서 술 냄새가 나지?” ‘헉!’ 나는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언젠가는 한여름에 강원도 산골에 사는 친구에게 놀러 갔는데, 자다가 새벽에 잠을 깼다.
너무나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궁이에 장작들을 넣고 불을 붙이려 해도 도무지 불이 붙지 않았다.
어릴 적 시골 부엌 아궁이에 불을 많이 때 본 경험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에어컨을 켜놓고 잠을 자던 친구는 어의가 없어 했다. 그는 눈을 부비며 내 방으로 왔다.
뒷산 약수터에 갔다가 발목을 다친 적이 있다. 평소에 다니던 길이었는데, 갑자기 미끄러졌다.
주저앉았는데, 왼다리 발목에서 뚝!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에 놀라 일어설 용기도 나지 않았다.
한참 후 비틀거리며 일어나 산길을 내려왔다. 아내와 병원으로 가서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통원치료를 했다.
약국 출입문의 문턱을 넘는 게 고역이었다. 평소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문턱, 태산처럼 높았다.
목발을 짚고 간신히 서서 택시를 기다릴 때는 가슴이 타들어갔다. ‘택시가 안 오면 어떡하나?’
나는 병치레를 하고 사고를 겪으며 ‘역지사지’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해야 한다는 위대한 인간의 윤리.
인간은 오랫동안 부족사회를 이루어왔다. 부족은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었다. 서로의 마음이 물처럼 자연스레 흘렀다.
굳이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아도 잘 알 수가 있었다. 항상 같은 곳에 살고 같은 일을 헸기에 소통의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약 2500여 전에 철기 문명이 도래했다. 철제 무기, 철제 농기구를 가진 부족은 청동기와 석기를 사용하는 다른 부족들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지구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때 성인(聖人)들이 등장했다. 그들의 중요한 가르침이 바로 역지사지다.
여러 부족들이 통합하여 거대한 제국이 만들어졌을 때, 가장 중요한 윤리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우리는 같은 지역, 같은 지구에 살지만 삶이 다 다르다. 당연히 생각이 다 다르다.
남의 입장이 되어보는 윤리가 서지 않으면, 우리는 만인이 만인의 적이 되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른 팔을 삐딱하게 치켜든 큰 검은 나무 십자가 뒤에
이름대신 누운 자가 ‘자유인’이라는 글발이 적힌 비석이 있고
생김새가 다른 열 몇 나라 문자로 제각기 ‘평화’라고 쓴
조그만 동판(銅版)을 등에 박은 무덤이 앉아 있다.
인간의 평화란 결국 살림새 생김새 다른 사람들이 모여
함께 정성들여 새기는 조그만 판인가?
내려다보이는 항구엔 크기 모양새 다른 배들이
약간은 헝클어진 채 평화롭게 모여 있다.
- 황동규, <카잔차키스의 무덤에서> 부분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삼라만상은 구슬처럼 서로 꿰어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두 하나로 어우러질 때, 평화가 오고 자유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