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무환(有備無患)
위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의 불멸하는 ‘자기(self)’를 모르는 사람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삼라만상을 둘러보면, 다들 모든 상황에 대비한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하다. 돌멩이는 지금 깨져나가도 괜찮다는 표정으로 무심히 앉아있다.
나무 그늘 밑의 풀들은 언제고 햇빛이 비치면 힘차게 위로 솟아오를 준비를 다 마친 듯하다.
그러다 그늘이 계속 지속되어도 속상해하지 않을 준비도 함께 다 한 듯하다. 누가 지나가다 발로 짓밟아도 신음소리는 내겠지만,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듯하다.
수풀 속을 지나가는 저 고양이도 천하태평이다. 인간의 출몰에 잠시 당황한 듯하지만, 이내 평상심을 회복한다.
이제 여름이 가나보다 매미들이 천수를 다하고 길가에 널브러져 있다. 그들은 서서히 먼지가 되어갈 것이다.
어떤 상황에도 완벽한 대비를 하고 있는 삼라만상, 그에 맞춰 인간도 그렇게 완벽한 준비를 할 수 있을까?
유비무환, 미리 그런 준비를 해야 근심 걱정이 없을 텐데. 인간이 다른 존재들처럼 매사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여 항상 태평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삼라만상이 항상 유비무환인 것은 그들에게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무한한 생성, 변화가 그들의 삶이다.
인간도 그들의 삶에 동참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당당한 그들의 일원이 될 수 있을까?
독일의 소설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첫 문장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그렇다. 삼라만상은 자신들 속에서 솟아나오는 것으로 살아간다. 그것이 계속 자신을 낳는 것이다.
풀은 자신의 씨앗에서 싹을 틔운다. 한평생 씨앗을 한껏 피운다. 어떤 상황이 와도 멈추지 않는다.
누가 낫으로 베어도 시퍼런 생명을 간직하고 있다. 그 생명이 다 고갈될 때까지 푸른빛을 잃지 않는다.
그러다 푸른빛이 다 사라지면 누렇게 말라간다. 먼지가 되어 폴폴폴 허공으로 날아간다.
자신이 왔던 고향으로 날아간다. 지상에 살았던 자신의 모든 흔적도 함께 날아간다.
원시인들도 다른 존재들처럼 물질인 육체로 살아가는 삶과 영원의 삶을 하나로 연결했다.
자신들의 신화를 모든 부족 구성원들이 공유했다. 함께 의례를 행하며, 영육(靈肉)이 하나인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그러다 철기시대가 등장하며 철학, 종교의 시대가 도래 했다. 철학과 종교도 영육(靈肉)이 하나인 삶을 추구했다.
철기시대 이후의 고도로 발전한 문명사회에서는 인간의 ‘자아(ego)’가 강고해졌다. 자아는 혼자서 완전하게 존재한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이 자아는 자신의 육체적 삶만으로 살아간다는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육체만의 삶은 쾌락의 극단까지 간다.
쾌락의 극단은 우울과 권태, 프로이트가 말하는 타나토스(죽음은 본능)다. 현대문명의 하늘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2500여 년 전에 등장한 철학과 종교는 한결같이 ‘자신들 속에서 솟아나오는 것으로 살아가라!’고 가르쳤다.
우리는 다시 육체의 삶과 영원의 삶이 하나로 연결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유비무환의 삶이다.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지다가
어느새 나는 네 심장 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죽지 않는 태풍의 눈이 되고 싶다.
- 최승자, <너에게> 부분
시인은 이 시대의 사제다.
우리 모두의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