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자연(無爲自然)

by 고석근

무위자연(無爲自然)


나는 지금 살고 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고 있다. - 사도 바울



콩고의 유목민인 피그미족은 다음과 같이 가젤을 사냥한다고 한다.


그들은 작은 언덕으로 올라가 땅을 고르고 거기에 가젤을 그린다. 꼬박 밤을 새운 후에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 남자가 활과 화살을 들고 태양이 떠오르는 쪽을 향해 선다.


그는 화살로 가젤 그림을 쏘아서 목 부분을 맞춘다. 여자는 두 팔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산에서 내려가 진짜 가젤을 사냥했다. 그들은 개인이 아니라 태양의 힘, 생명의 힘의 대리인 자격으로 사냥을 한 것이다.


그들은 의례를 통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과 온전히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개인의 힘’으로 사냥을 하면 어떻게 될까? 사냥감을 자신의 소유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냥을 하며 그들은 차츰 개인의 탐욕에 젖어갈 것이다. 태양의 힘, 생명의 힘으로 사냥을 할 때는 그들은 천자자연 앞에 당당했을 것이다.


그들은 태양

의 힘, 생명의 힘으로 하나가 되어 사랑 가득한 평등의 세상을 꾸려갔을 것이다.


현대 문명인은 소유물에 대한 탐욕으로 살아간다. 국가, 사회는 개인의 소유물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보증해준다.


개인의 힘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은 항상 에너지가 고갈된다. 태양의 힘, 생명의 힘과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매일 커피를 마시고 술을 마셔야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틴다. 세상은 소유물을 얻기 위한 아비규환의 전쟁터다.


사도 바울은 말했다. “나는 지금 살고 있다.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살고 있다.”


사도 바울은 원래 그리스 철학에 정통한 지식인이었다고 한다. 그리스 철학의 ‘개인’은 그를 항상 목마르게 했을 것이다.


그는 어느 날 기독교를 만나며, 자신 안의 그리스도가 깨어나는 기적을 체험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크게 보면, 노자가 말하는 도(道)와 같을 것이다. 우리 안의 영원한 생명의 샘.


노자는 도덕경에서 말한다. “도는 텅 비어 있으나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과 같고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무위자연, 천지자연이 스스로 그러하게 운행하는 이치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근대산업사회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이룩한 문명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근대인의 근본적인 철학이다.


‘생각하는 나’는 인류사 전체에서 보면, 특이한 존재다. 태양의 힘, 생명의 힘과 관계없이 오로지 자신 안의 힘으로 살아가겠다는 별종의 인간이다.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 노자의 도와 완전히 단절된 근대인, 이 근대인은 치명적인 기후위기를 불러왔다.


‘생각하는 나’가 현대 인류가 종말을 맞이할 수도 있는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생각하는 나’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안의 그리스도, 도가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오로지 우리 안의 그리스도, 도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우리 안의 태양의 힘, 생명의 힘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다. 다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샘물을 마실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당신이 내 부족 사람들에게 가르쳐준 것들을

나 또한 알게 하시고

당신이 모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춰 둔 교훈들을

나 또한 배우게 하소서.


- 노란 종달새, <수우족 기도문> 부분



‘생각하는 나’는 결국엔 나만 생각하게 되어있다. 나만 생각하는 인간이라니! 우리는 얼마나 왜소한가!


우주의 힘이 뿜어져 나오는 원시인들의 위엄 있는 표정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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