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비교 종교학자 오강남의 ‘세계종교 둘러보기’를 읽으며 생각한다. 흔히 하는 말이다. ‘얼마나 많은 참혹한 전쟁이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는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가 사라져야한다’고 생각하거나, ‘종교의 무용론’을 펴기도 한다.
그럼 종교가 사라지면 사람들이 평화롭게 잘 살아갈까? 그러면 아마 다른 이름, 예를 들어 정의의 이름으로 참혹한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종교는 겉으로 내거는 이름이고 실제로는 자신들의 탐욕이 깊은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다
인간에게는 두 마음이 있다.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획득된 본성(本性),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마음이 있다.
다른 하나의 마음은 자아(自我)의 마음이다. 자아는 나라는 의식이다. ‘나’라는 생각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게 된다.
이 ‘나’가 본성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여러 형태의 인간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본성을 밖으로 비추어 다른 사람을 보게 되면, 다른 사람의 악행이 훤하게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항상 비난한다. 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혹하다.
이 폭력이 종교나 정의,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이 세상은 아수라장이 된다. 다들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래서 성현(聖賢)들은 항상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라고 했다. 인의예지를 아는 마음의 빛을 자신에게 비추게 되면, 자신이 얼마나 악하게 살아가고 있는지가 훤히 보인다.
하지만 자신을 성찰하는 삶은 힘들다. 항상 바쁘기 때문이다. 자신을 성찰하고 있다가는 남들에게 뒤쳐진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계속 우리를 남들보다 잘난 사람이 되라고 부추기지 않는가? 우리는 오로지 밖을 향해 질주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선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천하의 무도한 인간이 되어 있다.
인간의 길을 찾아가는 공부는 ‘자신의 마음 성찰하기’다. 이게 전부일 것이다. 이것을 공자의 언어로 표현하면, 충(忠)과 서(恕)가 될 것이다.
자신의 마음(心)의 중(中)심 잡기,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心)과 같아(如)지기. 다른 성인들도 언어는 다르지만 같은 뜻의 말을 했다.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를 하지 않았던가?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나이다.”
석가는 도를 깨친 후 깊은 고민해 빠졌다. ‘사람들이 내 말을 알아들을까?’ 소크라테스는 부당한 사형선고에 대한 변론을 마치고 묵묵히 독배를 마시지 않았던가?
우리가 마음을 고요히 하여 원래의 마음이 되면, 성인들의 언행을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다 마음이 흔들리게 되면, 온갖 악행을 저지로는 사람들의 마음과 같아진다. 우리의 마음이 어떤 욕심의 불길로 타오를 때, 우리는 어떤 악도 행할 것 같지 않은가?
끈질기게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서 살아가기, 이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어 모두 죽을 때까지 싸우게 된다.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들은 본성을 깨친 사람들이다. 그 깨우침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종교를 창시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아직 자신의 본성을 깨워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들은 자신의 탐욕을 위해 맹목적으로 종교라는 거대한 힘을 믿기 쉽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종교에 대해 절망한다.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인간과 세상이 싫더라도 항상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성현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우리가 자신의 본성을 깨우면 천지가 감응하여 변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천지개벽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 본래의 마음 깨우기, 이것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온 마음을 다해 행해야 할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