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와 함께

by 고석근

홀로와 함께



인도에서 중국으로 온 달마 대사가 소림사 뒷산의 동굴에서 면벽수련을 하던 어느 날, 신광이라는 젊은 승려가 찾아와 제자가 되길 청하였다.


신광은 달마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달마는 벽을 향해 바위처럼 앉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엄동설한에 오직 법을 구하기 위한 일념으로 꿇어앉아 버틴 지 사흘, 달마가 신광에게 물었다.


“네가 정말 간절히 법을 구하는지 어디 내게 신(信)을 보이게. 믿음 없는 놈은 천년가도 헛수고일 뿐이지.”


신광은 허리의 칼을 뽑아 왼팔을 싹둑 잘라 바쳤다. 달마는 신광을 제자로 삼고 혜가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다.


혜가는 선정(禪定)을 익혀갔지만, 좀처럼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가 없었다. “스님, 저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달마가 말했다. “편안치 못한 너의 마음을 꺼내 놓아라. 내가 편안케 하리라.” 혜가는 아무리 마음속을 뒤져보아도 편안치 못한 마음을 찾을 수가 없었다.


혜가가 말했다. “도저히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이미 너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느니라.”


혜가는 후에 달마의 법통을 이어 선종의 제2대 조사가 되었다. 그들의 정신이 면면히 흘러 제6대 조사 혜능 이후에 중국의 선불교가 활짝 꽃을 피우게 되었다.


두 사람의 멋진 만남, 이 일화는 언제 들어도 가슴을 뛰게 한다. 만일 이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벌어지면 어떻게 될까?


공부하러 오겠다는 사람을 추운 겨울에 사흘이나 밖에서 기다리게 하면? 더더구나 공부할 마음이 정말 있는지 증명하라고 하면? 증명하기 위해 왼팔을 싹둑 잘라 바친다면?


아마 이 사건은 21세기 최고의 엽기적인 사건이 되어 온갖 언론매체를 도배하게 될 것이다.


21세기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는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애플이 갖고 있는 모든 기술을 포기할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신광과 잡스의 생각이 같지 않은가? 달마의 선(禪), 소크라테스의 로고스(logos)는 자신들의 목숨을 걸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는 두 사람.


그 두 사람에게서 우리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 가치, 사람의 만남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신광이 찾아 왔을 때, 달마가 쉽게 받아주었다면 신광의 깨달음은 쉽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궁극적 깨달음은 절박한 상황에서 온다. 온 몸을 다해 간절히 찾았을 때 온다. 그래서 신광은 ‘쉽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외로움을 견뎌내야 한다. 외로움이 충분히 익어 고독이 되어야 한다. 끝없는 모래사막에서 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아무것도 가진 없이,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마음이 될 수 있다.


이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공부다. 그 길을 걸어 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가르침이다.


크게 보면 모든 인간관계가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가야 한다.


하지만 이 길을 가는 것은 힘들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서로에게 다가가려 한다.


혼자 조용히 머물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없어서 그렇다. 무소의 뿔처럼 갈 수 없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수 없다.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쉽게 하나가 되고 싶은 사람들, 그래서 이 세상은 쉽게 전체주의, 파시즘의 생지옥이 된다.


홀로 설 수 없는 사람은 남을 지배하려 든다. 사디즘이다. 지배하지 못하면 남에게 지배당하려 한다. 마조히즘이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끈끈한 인간관계, 많은 사람들의 인간관계다. 이 병적인 인간관계가 사랑의 이름으로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


‘사랑의 매’라는 말이 이것을 중명해주고 있다. 사람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하지 않는가?


사랑은 혼자 설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매를 들어서 하겠다는 사람은 사랑의 능력이 없다.


남을 사랑하려면 먼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텅 빈 충만의 힘을 길러야 한다.


스스로 충만하면 그 힘이 넘쳐 남에게 간다. 그것이 사랑이다. 달마의 충만한 내적 힘이 신광을 구원해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충만한 힘을 알아보는 잡스가 이 시대 인류의 모델인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잘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의 인간관계는 병적이지 않게 된다. 사디즘, 마조히즘에 물든 사람들은 남을 사랑한다면서 때리고 죽이게 된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엽기적인 사건사고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안타까이 묻는다. “왜 내 마음을 몰라줘?”


그들은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폭력인 줄을 모른다.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알아줘야 한다.


자신의 마구 날뛰는 마음을 고요히 바라보면, 신광처럼 마음이 텅 비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텅 빈 마음이 본성(본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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