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利)와 의(義)
언젠가부터 전철역의 화장실 풍경이 달라지고 있다. 이따금 물을 내리지 않는 변기들을 보았는데, 이제는 수시로 본다.
‘헉!’ 변과 물이 범벅이 되어 있는 변기통, 그래서 되도록이면 전철역의 화장실에는 들르지 않으려 한다.
왜 이런 파렴치한들이 자꾸만 늘어나게 되었을까? 처음에는 한 두 사람이 몰염치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면 나도! 나도!... .’ 어느 새 비상이 일상이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화장실 안에 몰래 카메라를 달자는 여론이 형성될까?
고대의 현자 맹자가 양혜왕을 만났다. 왕이 기뻐하며 말했다. “선생께서 천 리를 멀다 하지 않으시고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에 어떤 이익을 주실 수 있겠는지요?”
맹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 왕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익이 될까 하시면, 대부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안에 이익이 될까 하며, 사(士)와 서인(庶人)들은 어떻게 하면 내 몸에 이익이 될까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익만을 취하려 한다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이익을 중심에 놓는 사회다. 중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는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면 사회 전체적으로 최대의 이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논조의 글이 실려 있다.
정말 그럴까? 각자가 치열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는 전체적으로 살기가 더 좋아지고 있는가?
사회 전체의 물질적 풍요는 이루어졌지만, 사회 전체가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의 이기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왕은 어떻게 이 세상을 다스려야 할까?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통치철학의 교과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자의 용맹함과 여우의 간교함을 갖춘 왕’ 마키아벨리는 이런 왕을 공화정으로 가는 과도기로 생각했다.
국민, 시민이 깨어나 정치적 주인이 될 때, 그러한 군주는 국가, 사회의 의를 중심에 놓는 통치철학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데 국민, 시민이 깨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각자 자신의 이익 추구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
군주는 계속 의보다는 이익을 중심에 놓는 통치 철학을 유지할 것이다. 철기 문명 이래의 정치의 장은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면 전체사회에 이익이 된다는 이론을 편 사람은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로 알려져 있다.
아담 스미스는 원래 ‘도덕 감정론’을 쓴 도덕 철학자였다. 인간은 타고나기를 도덕에 대한 감수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뜨거운 애국심으로 국부론을 썼다. 그는 각자 개인이 이익을 추구하더라도, 도덕 감정이 있어 극단적인 이기심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게 되었는가? 끝없는 탐욕 추구가 이 인류를 종말로 치닫게 하고 있지 않는가?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서 도덕 감정이 이기심을 제어할 수 있을까?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라 쉽게 자신의 이익에 빠지기 쉽다.
한 생각 잘못하면, 자신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탐욕을 부리는 게 인간이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반성하지 않는 게 인간이다.
인간의 도덕 감정은 약하다. 수백 만 년의 인간 진화과정에서 불과 수 만 년 전에 이 공감의 능력이 생겨났다.
크게 보면 인간은 동물성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인간에게 이기심을 추구하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앞으로의 인류 역사는 인류의 존망을 건 이와 의의 한판 싸움이 될 것이다. 초반전은 이가 의를 크게 이겼다. 인류학자들은 인류세가 끝나가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