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오래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집에서 장례식을 했다. 난생 처음 하는 곡이라 우리 형제들은 지팡이를 짚고 어색해하며 ‘아이고’를 반복했다.
우리 형제들이 곡소리에 지쳐갈 무렵, 이웃 마을에 사는 아버지 친구 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셨다.
얼근하게 술이 취하신 그 분은 우리 앞에서 비틀거리며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곡이 그게 뭐야?”
우리는 자신들도 모르게 피식 웃게 되었다. 그 분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우리는 피식 피식 웃고.
그때 한 연극 연출가의 일화가 떠올랐다. 젊었을 적에, 한 친구가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그에게 20만원을 주고는 장례식장에 와서 고스톱을 쳐달라고 부탁했단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열심히 고스톱을 치게 되었단다. 차츰 분위기가 무르익고 여기저기서 웃음보가 터져 나오고.
그러다 화들짝 깨달았다고 한다. ‘아, 이거였구나!’ 사람이 슬픔의 늪에 너무 깊이 빠져 있으면 위험하다.
슬픔이 깊은 만큼 기쁨도 깊어져야 한다. 이게 ‘삶의 원리’다. 죽음까지 포함하는 삶이 진정한 삶이다.
삶이 빠진 죽음은 진정한 죽음이 아니다. 땅에 떨어진 낙엽은 다음 해 봄에 풀, 나무의 영양분이 되어 부활한다.
현대 철학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의 저서 ‘힘의 의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세계에서는 오직 예술가와 어린아이만이 어떠한 도덕적 책임도 묻지 않고 천진무구하게 생성과 소멸, 건설과 파괴의 놀이를 행한다. 어린이와 예술가가 유희하듯이 이 영원한 살아있는 불도 유희하며 무구하게 타오르다가 사그라든다. 그리고 장구한 세월은 이러한 유희를 자신과 행한다.’
니체는 ‘아이’를 최고로 인간으로 본다. 아이는 생성과 소멸의 유희다. 아이는 천지자연 그 자체다.
아이가 된 인간이 예술가다.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고스톱을 치며, 장례식에서 곡을 하다 웃음을 터드리며 예술가가 된다.
진도에서는 지금도 장례식에 광대패를 초대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 한다. 죽음의 슬픔에 빠져 있는 유족들 앞에서 광대들이 아이 낳는 연기를 한다고 한다.
유족들은 죽음 앞에서 탄생을 우스꽝스럽게 연기하는 광대들을 통해 삶이라는 게 죽음과 삶의 영원한 수레바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2대 본능을 ‘에르스(삶의 본능)와 타나토스(죽음의 본능)’라고 했다.
인간은 찬란한 삶의 기쁨을 추구하면서도 저 무한한 우주 속으로 사라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천지자연의 이치, 무한한 삶과 죽음의 순환이 우리의 깊은 마음에 있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삶과 죽음을 나눠서 본다. 현대 문명은 죽음을 추방한다. 죽음은 어두컴컴한 지하 장례식장에 있다.
평소에는 죽음이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삶만 있는 세상에는 삶도 사라진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붙어 있기 때문이다.
N극과 S극이 반반씩 붙어 있는 자석의 원리와 같다. 이 자석에서 N극을 떼어버리면, S극이 다시 N극과 S극으로 반반씩 나눠진다.
계속 N극을 떼어버리게 되면, S극이 계속 작아져 아예 자석이 사라지고 만다. 삶도 이와 같다.
우리가 삶에서 죽음을 떼어버리게 되면, 삶은 점점 작아져 아예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
삶만을 찬미하는 우리 사회에 죽음의 잿빛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진 이유다. 우리는 죽음조차 잊고, 그래서 삶조차 잊고, 신나게 살아가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삶과 죽음을 함께 받아들였으면 한다. 장례식부터 삶과 죽음의 한판 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에 삶이 충만해지고, 삶의 빛과 향이 온 사회에 가득해지면 얼마나 사는 게 신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