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청탁 없이 이 세계로 내던져진, 유한한,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어두운 극 사이에 처박혀진, 해명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진, 불안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주위세계를 배려하고 동료 인간들을 심려하고, 자기 자신에는 염려로 처신하는, ‘아무 것도 아닌 피조물’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에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수천 명의 남녀를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보냈다고 한다.
누구나 최고의 권력을 가지게 되면 불사약을 생각할 것 같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과학을 통해 영생 불사를 꿈꾸는 것 같다.
동물 실험에서는 원숭이의 머리이식 수술이 성공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계속 자신의 머리를 다른 젊은 사람의 몸에 이식하면 영원이 젊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현대를 ‘과학기술의 시대’라고 한다. 과거 중세가 신 중심인 신의 시대였다면 이제는 과학기술이 중심인 시대다.
과학 기술이 신의 자리에 앉아있는 시대인 것이다. 과학 기술이 우리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시대인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의 미래 가상소설 ‘멋진 신세계’는 과학 기술이 만든 지상 낙원이다.
‘과학의 발달로 50대에도 20대처럼 탱탱한 피부를 지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죽는다. 세뇌교육을 통해 죽음마저도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불쾌감이나 두려움, 열등감, 고통 등을 느낄 때에는 ‘소마(soma)’라고 불리는 마약성분의 알약 몇 알만 먹으면 완전히 해소된다. 누구나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서 걱정도 구속도 없이 완벽한 유희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아닌가? 그런데 그들과 달리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온 존은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친다.
“여러분은 자유롭고 인간다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인간성과 자유가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합니까?”
그는 무스타파 몬드 총통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神)을 원하고, 시(詩)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善)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원합니다.”
야만인 존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으며 ‘인간’을 알았던 것이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여서 당연히 육체적 안락을 원한다.
이 욕구는 멋진 신세계에서 완벽히 만족시켜 준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 생존의 욕구 외에도 자기 초월의 욕구가 있다.
인간은 육체적 존재인 동시에 ‘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는 이 영적 욕구는 전혀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육체적 욕구에 취한 멋진 신세계의 문명인들은 존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 수 없는 깊은 공허감을 느꼈을 것이다. 단지 세뇌가 되어 희미하게 느꼈기에 의식적으로는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육체적 욕구와 영적 욕구, 어느 것이 힘이 더 셀까? 영적 욕구를 알게 된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그 길을 가게 되어 있다.
등산의 재미를 아는 사람은 힘들게 산에 오르지 않는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에베레스트 산에 오르지 않는가?
이것을 알고 있는 존은 끝내 굴복하지 않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역사상 멋지게 살다간 사람들은 다 존이 아니었던가?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멋진 신세계에 사는 문명인들을 ‘비본래적 존재’라고 말한다.
그들은 죽음을 망각하고, 진정한 자신을 잃어버린 채, 자신들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에 관하여 생각 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물욕에 젖어 오로지 돈을 좇고, 말초적 쾌락에 빠져,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하이데거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의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본래적인 실존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을 과학 기술로 없애버리게 되면, 인간의 삶도 함께 없어진다. 죽음을 모르고 살아가면 우리 안의 영적 욕구가 깨어나지 않는다.
영적 욕구가 없는 인간은 육체의 안락만을 위해 살아간다. 결국에는 깊은 권태와 우울감에 빠지게 되어 있다.
권태와 우울감은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을 깨워 생기를 잃고 시들시들 죽어가게 한다.
소마 같은 마약에 취한다고 해서 이런 삶의 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육체적 욕구의 만족을 넘어 영적 욕구가 충족되어야 ‘살아 있음의 환희’를 느끼게 된다.
그때 우리는 외치게 된다. “아, 이제 죽어도 좋아!” 이 찬란한 행복은 불행할 권리를 마음껏 누린 인간에게만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