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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惡)의 평범성

by 고석근

악(惡)의 평범성


아이히만은 말했다. “나는 무죄입니다.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닙니다.”


-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어제 공부 모임에서 한 회원이 며칠 간 ‘반지의 제왕’에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현실을 등한시하게 되었다고 했다.


사람은 ‘한 생각’에 빠지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게임에 깊이 빠진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살인을 저지르기도 하는 것이다.


영화, 드라마, 게임이 문제가 아니라, 깊이 빠지는 게 문제다. 깊이 빠져 중독이 되는 게 문제다.


그래서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소격효과’를 제시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의도

적으로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우리는 깊은 몰입을 좋아한다. 몰입은 우리를 황홀하게 한다. 자신을 사라지게 한다.


하지만 이게 반복되다보면, 그 즐거움에 깊이 빠지게 되고 차츰 현실을 벗어나 허상 속을 떠돌게 된다.


그러다보면 비현실적인 언행을 하게 되고, 그게 무서운 범죄가 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이다.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거악을 창안하는 것은 히틀러 같은 악인이지만, 거악과 손을 잡거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인지 모른다.”


그녀는 일갈했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을 체포해 수용소로 이송하는 일을 총괄한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았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자신은 무죄”라는 주장을 했다.


그는 줄곧 “나는 의무를 준수했고 명령에 따랐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고 한다. 그의 변명에는 죄의식은커녕 고민의 흔적조차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상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한 성실한 국가 공무원인 자신이 왜 죄인이냐?’고 묻고 있었던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잘못을 ‘무사유(無思惟)’라고 했다.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로 태어났기에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생각은 ‘인간의 조건’이다. 생각하지 않고 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 영화를 볼 때나 게임을 할 때 생각을 해야 한다. 깊이 몰입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려야 한다. ‘지금 영화를 보고 있군.’ 깊이 빠져 있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깊이 빠져 있는 마음과 그것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마음. 조용히 들여다보는 마음은 우리의 본래의 마음, 본성(本性)이다.


이 본성이 우리의 파도치는 마음을 가라앉히게 해야 한다. 그러면 이 본성은 우리의 마음을 ‘지금 여기’에 머물게 한다.


‘지금 여기’에서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게임을 해야 한다. 튼튼하게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게임에서 현실을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것은 본성이 무의식중에 행하는 것이다. 본성은 신의 마음이다. 신이 알아서 우리를 잘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그 신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알아차림.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하는 행동,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 이때 우리는 신의 마음과 하나가 된다.


우리는 어떤 직업을 가졌건, 어떤 언행을 하고 있건, 우리는 항상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을 알아차리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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