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따이띠리야 우파니샤드’에는 참나, 아트만을 둘러싼 층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첫 번째는 음식층이다. 음식으로 만들어지는 육체적 몸이다.
두 번째는 호흡층이다. 음식을 산화시켜서 생명으로 바꾼다.
세 번째는 마음층이다. ‘나’라는 느낌이다. 음식층의 고통과 쾌락에 연연한다.
그리고 커다란 틈새가 있다.
네 번째는 지혜층이다. 산, 나무, 동물과 함께 우리의 본성이 공유하고 있다.
다섯 번째는 희열층이다. 초월성의 핵심이며 초월 그 자체다.
- 조셉 캠벨, <블리스로 가는 길>에서
나는 ‘따이띠리야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네 번째의 마음, ‘지혜층’에 가 본 적이 있다.
10여 년 전, 어느 날 밤에 잠을 자다가 깼다. 내 몸이 이상했다. 심장이 그때처럼 크게 뛰어 본 적이 없다.
온 몸에서 땀이 물 흐르듯 흘러내렸다. 손으로 몸을 만져보니, 팔과 다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가슴, 배 부위만 희미한 온기가 있었다. ‘아, 이렇게 죽어가는구나!’ 그런데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무심했다. 나는 ‘산, 나무, 동물과 함께 우리의 본성이 공유하고 있는 마음’에 가 있었던 것이다.
자타불이(自他不二), 나와 남이 둘이 아닌 세상, 참으로 평화로웠다. 삶과 죽음이 하나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마지막의 마음, ‘희열층’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옆에서 자는 아내가 걱정이 되었다.
‘지금 깨우면 얼마나 놀랄까? 죽어가는 남편을 보게 해서는 안 돼! 내일 아침에 죽은 남편을 보는 게 더 나을 거야!’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는 상태, 나는 깊은 명상에 들어갔던 것이다.
아마 나는 희열층으로 들어가며 잠이 들었을 것이다. 이 마음은 ‘초월성의 핵심이며 초월 그 자체’다.
희열층 안에는 진짜 나, 참나(self)가 있다. 참나는 신(神)이다. 반가사유상의 은은한 미소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다. 오!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나는 세 번째의 마음, ‘자아(ego)’가 되었던 것이다.
음식층의 고통과 쾌락에 연연하는 마음이 되었던 것이다. 음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다시 음식으로 돌아가는 마음, 몸.
우리는 머리로는 음식층의 마음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몸은 인생무상(人生無常)에 몸서리를 친다.
결국 마음의 문제는 자아의 문제다. ‘이 자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요가를 배우고 명상을 배웠지만,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날 밤, 크게 아픈 상태에서 ‘삶도 죽음도 없는 마음’을 선명하게 경험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고된 고행을 하고 금식을 할 것이다.
그 뒤, 대학병원에 가고, 오랫동안 마음의 병에 시달리면서, 마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명상을 하며, 인문학을 공부를 하며, 마음의 층위를 헤아려 본다. ‘아, 나도 언젠가는 참나를 명확히 깨닫고 이 한 생을 멋지게 살다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