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다 끝일까?
북명(北冥)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은 곤(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곤은 변하여 새가 된다.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의 등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떨쳐 일어나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명(南冥)으로 이동한다.
- 장자, <장자 제1편 소요유(逍遙遊)>에서
악몽을 꾸다 깰 때가 있다. ‘휴, 꿈이었구나!’ 죽을 때도 이렇지 않을까? ‘휴, 이제 끝이로구나! 긴 잠을 자자.’
하지만 정말 끝일까? 인생을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 하지만, 인생이 죽으면 깨어나는 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장자는 꿈에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다 깨어났다. 깨어나서는 장자는 중얼거렸다.
“지금 나는 나비의 꿈속에서 인간이 되어 지금 여기에 있는 건가?” 장자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삼라만상은 서로의 꿈속에 있다. 서로 마주보는 거울과 같다. 서로를 무한히 비춘다.
‘나’라는 것은 ‘나라는 생각’일 뿐이다. 생각이 멈추면 나는 사라진다. 생각을 할 때만 나는 나다.
생각이 희미해지는 잠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자신을.
따라서 꿈에서 깨어나도 악몽은 끝난 게 아니다. 그건 업보(業報)가 되어 우리의 삶 자체가 된다.
우리는 자신이면서 다른 존재가 되어 무한히 생성 변화한다. 이러한 삶의 실상이 겉으로는 육체적 생명과 사회적 생명 두 개로 나타난다.
우리가 생각(꿈을 꾸는)하는 한, 죽은 사람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생각하지 않아도 죽은 사람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살아 있는 동안 영생하라!” 죽음은 허상인 것이다. 허상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자신이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장자는 허상 속에 있는 존재를 곤이라는 물고기로 비유한다. ‘곤은 변하여 새가 된다.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우리가 하늘로 날아올라야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훤히 보인다. 우물 안에서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육체를 떠나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정신, 그 정신의 힘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육체는 우주의 기(氣)가 잠시 물질로 드러난 것뿐이라는 것을.
우리의 본질은 무한한 생명인 에너지(기)라는 것을. 그런데 우리 대다수는 곤으로 살아가기에 육체가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곤의 낮은 정신을 가진 인간이 어떤 신념을 갖게 되면 무섭다. ‘내 이 한 목숨 바쳐서 정의를 세우리라!’
우리가 붕이 되지 않으면 정의를 행할 수가 없다. 자신의 신념대로 살기 전에 우리는 자신의 정신을 항상 점검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무자비한 대다수 살육들은 거룩한 종교,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다.
많은 사적인 복수, 폭력들도 신념에 의해 이루어진다. ‘묻지마 범행’은 없다. 범인은 속으로 수백 번은 묻고 나서 범행을 하는 것이다.
자신이 묻고 자신이 대답하니, 자신의 마음의 우물을 벗어나지 못해 무자비한 범행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 동양의 사마천은 사기를 썼다. ‘누구나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죽나 나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동서양에서 말하는 사후의 심판은 하나의 ‘방편(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붕이 되지 못한 곤에게는 그렇게 겁을 줘야 자신의 삶과 죽음을 함부로 하지 못할 테니까.
오래 전 술자리에서 한 분이 술주정을 했다. “... 내 마음은 어떻게 해?” 그러자 누가 소리쳤다. “네 마음은 네가 책임져야지.”
그렇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다들 공자의 수준까지 올라가면 얼마나 좋을까?
공자는 70이 되어 말했다.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