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진리는 어떤 특정한 종류의 생물(즉 인간)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오류이다. 생을 위한 가치가 어떤 관념의 진위를 궁극적으로 결정한다.
- 니체, <힘에의 의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바꿔도 될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같은 사람인 적이 없다.’ ‘우리는 한번 만난 사람은 다시는 만날 수 없다.’
그럼 나는 누구인가? ‘없다’가 답이 될 것이다. 그럼 ‘나’라는 동일성의 존재가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서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세상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 니체는 다음과 같이 답을 한다.
‘진리는 어떤 특정한 종류의 생물(즉 인간)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오류이다. 생을 위한 가치가 어떤 관념의 진위를 궁극적으로 결정한다.’
인간은 살기 위해 진리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진리를 의심해야 하고 항상 진리를 새롭게 재정립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진리’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지자연은 항상 생성, 변화하기에 우리는 정지된 상태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삼라만상은 실체로 보이지만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단지 이름일 뿐인 것이다.
나의 몸도 그동안 먹은 것들과 호흡한 것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이다. 생각이라는 것들도 여러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 속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라는 망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을 위한 가치가 어떤 관념의 진위를 궁극적으로 결정하게’ 해야 한다.
짐승들은 아무거나 먹는 것 같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몸에 좋은 것만 먹는다.
니체는 진리도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내게 좋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니체는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고양시켜주는 것이 자신에게 선(善)이고 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미셸 푸코는 “내가 누구인지를 묻지 말고, 내가 계속 같은 사람인지도 묻지 말라”고 했다.
동일성, 객관성 같은 것은 허상이기에,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면 그 사람을 옭아매고 징치하는 폭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또 다른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는 “접속하라! 창조하라!”고 했다. 우리는 다른 무언가와 접속해서 어떤 존재가 된다.
여자를 만나 결혼하면 남자는 남편이 된다. 그러다 자녀를 두게 되면 아버지가 된다.
인간은 스스로 무언가가 되는 게 아니다. 홀로라는 건 없다. ‘나 홀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지독한 망상이다.
이 망상에 한번 사로잡히게 되면 ‘나’라는 허상을 위해 한평생을 허망하게 보내게 된다.
들뢰즈는 자신의 동일성에 빠진 ‘수목형의 삶’을 벗어나 자신을 끊임없이 새로이 구성해가는 ‘리좀의 삶’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수목형의 삶은 나무 같은 삶이다. 씨앗이 자신을 전개해가는 삶. 나무는 씨앗에서 시작해 땅으로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줄기와 가지를 뻗어 올리며 살아간다.
정체성이 뚜렷한 삶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명확히 정해져 있다.
하지만 리좀의 삶은 다르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도 다른 곳에 다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대나무, 감자, 고구마 같은 식물들이다. 그들은 정해진 뿌리(근원)가 없다. 노마드(유목민)의 삶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다수 사람들은 ‘정체성의 감옥’에 갇혀 살다 갔다. 뛰어난 사람들만이 그 감옥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간수들이 있다. 그들은 수시로 우리에게 소리치고 있다.
“남자는 이래야 해! 여자는 이래야 해! 학생은 이래야 해! 부모는 이래야 해! 자식은 이래야 해! 회사원은 이래야 해!...... .”
니체는 이러한 간수들을 만들어내는 신을 죽이며 현대철학의 문을 열었다. 그는 “진리는 추악하다”고 일갈하며 우리를 진리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