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한 세상
초조가 세상을 뒤덮고 있다. 현대인들은 너나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 니체, <반시대적 고찰>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입구에 기대어 서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헉!’ 놀랐다. 다들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이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견디기 위해 다들 자신들만의 스마트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나만 멀뚱거리고 있다. 기계 문명에 대한 거부감으로 오랫동안 핸드폰을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이 갖게 된 핸드폰.
언젠가부터 이름이 스마트폰으로 바뀌었다. 스티브 잡스가 스마트폰을 만들면서 이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스마트폰의 아이디어를 불교의 화엄 사상에서 얻었다는 글을 어디서 읽은 적이 있다.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다’ 스마트폰 하나에 온 세상이 다 있는 것이다.
이 스마트폰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스마트한 세상이 일시에 사라지는 김태준 감독의 스릴러 영화.
회사원 나미는 퇴근 후 친구와 술을 마신 뒤 귀갓길에 버스를 탔다가 급히 내리는 바람에 스마트폰을 떨어뜨리고 내리게 된다.
우연히 스마트폰을 주운 준영은 나미의 폰에 스파이웨어를 설치한 뒤 수리점을 통해 돌려준다.
준영은 나미의 스마트폰으로 취미, 취향, 직업, 동선, 경제력, 인간관계 등 나미의 모든 것을 알아낸 후 정체를 숨긴 채 나미에게 접근한다.
자신도 모르게 스마트폰에 심어진 스파이웨어로 나미의 일상생활이 실시간으로 준영과 공유된다.
본다는 것은 강자의 특권이다. 약자는 강자 앞에서 눈을 내리깐다. 온전히 자신을 내맡긴 나미는 준영의 먹잇감이다.
서서히 나미의 삶이 망가져간다. 준영의 농간으로 함께 사는 친구가 스파이웨어를 심었다고 오해를 받으며 나미를 떠나게 된다.
준영은 나미의 아버지가 자신을 의심하자 나미의 아버지를 납치하게 된다. 준영의 뒤를 쫓는 형사들.
단지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나미의 삶 전체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게 된다.
현대사회를 신이 죽은 사회라고 한다. 신이라는 절대 진리가 사라지게 되면서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될 용기가 없다. 신 대신에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다. 바로 과학이다.
과학으로 스마트한 세상을 지상에 만드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의 예언대로 인간은 ‘호모 데우스(신적인 인간)’가 되어가고 있다.
지하철 안에서 다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광경, 기괴스럽다. 진정한 스마트한 세상은 이 지하철 안에서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지하철 안, 덜컹거리고 복작거리는 여기가 스마트한 세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신이 약속한 허구의 천국과 작은 기계 속으로 들어가는 스마트한 세상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신은 앞으로도 여러 모습으로 변신하며 계속 인간 위에 군림할 것이다. 왜 인간은 스스로 스마트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을까?
안내 방송이 나오자 꿈에서 깨어난 듯 부랴부랴 내리는 승객들,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니체는 말한다. “초조가 세상을 뒤덮고 있다. 현대인들은 너나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사회의 모든 불안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갈 용기가 없는 현대인들, 신에게 자신들의 생살여탈권을 부여하고 살아간다.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은 그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살아가자고 노래한다.
‘이제/기성의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이제/기성의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이제/기성의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이제/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어떠한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고 선언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생각하는 동물로 진화한 인간, 생각을 잘못하게 되면 동물이었던 시절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