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계보
관능에 대한 가장 극심한 독설들은 노쇠자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고 금욕자들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었으며 금욕자가 될 수 없었던 자들, 그리고 금욕자가 될 필요가 있었던 자들로부터 나온 것들이었다.
- 니체, <우상의 황혼>
아주 오래전 불꽃같은 사랑을 하던 시절, 나는 내 사랑 또래의 여자들에게도 친절하게 되었다.
버스를 탈 때는 그녀들 뒤에 섰다. 흡사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들이 군복을 입은 청년들에게 친절한 것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니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타적인 사랑, 고상한 사랑은 관능적인 사랑이 승화된 것으로 본다.
그는 정신적인 사랑을 고귀하게 보고 육체적인 사랑을 저열하게 보는 우리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망치를 들이댄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육체적인 욕망에 대한 죄의식을 갖고 살아왔던가! 우리는 관능적인 사랑 행위를 보면 불편하다.
실제로 관능적인 사랑과 이타적인 고매한 사랑은 하나인데, 그것들은 하나의 뿌리를 갖고 무성한 잎과 꽃을 피워내는 나무와 같은데.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우리의 옛이야기 ‘견우와 직녀’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견우는 이름 그대로 소 기르는 목동이었고, 옥황상제의 딸인 직녀는 이름 그대로 베를 짜는 젊은 처녀였다.
옥황상제는 두 사람을 결혼시켜주었다. 그러자 이들은 사랑에 빠져 자신들이 하는 일에 소홀히 하게 되었다.
대노한 옥황상제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견우는 동쪽에, 직녀는 서쪽에 각각 떨어져 살게 했다.
두 사람이 흘린 눈물이 땅으로 떨어져 홍수를 일으켰다. 사람들과 동물들이 모여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견우와 직녀가 만날 수 있게 해주기로 결의했다.
해마다 칠월 칠석이 되면, 까치와 까마귀들이 자신들의 몸으로 은하수에 오작교를 놓았다.
그 덕분에 견우와 직녀는 1년에 하루나마 만날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홍수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인류는 수 만년 동안 수렵채집생활을 했다. 풍부한 먹거리 덕분에 마음껏 사랑을 나누며 살았다.
하지만 약 1만여년 전에 농경이 시작되면서 열심히 일을 해야 했다. 사랑을 금지시켜야 했다.
그래서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말했다. 그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상황은 대략 1만 년 전 달라졌다. 이때부터 사피엔스는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몇몇 동물과 식물 종의 삶을 조작하는 데 바치기 시작했다. 인간은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씨를 뿌리고 작물에 물을 대고 잡초를 뽑고 좋은 목초지로 양을 끌고 갔다.’
일은 열심히 하지만 삶의 질은 전혀 높아지지 않고 오히려 낮아지는 농경생활, ‘노는 인간’에서 ‘일하는 인간’으로 개조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바로 ‘금욕’이었다.
니체는 말한다. ‘관능에 대한 가장 극심한 독설들은 금욕자가 될 수 없었던 자들, 그리고 금욕자가 될 필요가 있었던 자들로부터 나온 것들이었다.’
사랑의 금욕에 길들여진 인간들은 금욕자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절도 있는 사랑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관능적인 사랑에 대해 독설을 내밭는다. 자신들 깊은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어두운 성욕 때문이다.
그들은 그 어두운 그림자를 남들에게 마구 투사한다. 그래야 깊은 죄의식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으니까.
‘금욕자가 될 필요가 있었던 자들’도 있었다. 왕이나 귀족들에게 잘 보여 종교 권력을 갖고자 하는 사이비 종교인들이다.
이제 사랑이 해방된 시대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을 제대로 누리고 있을까? 범람하고 있는 성과 사랑의 홍수에 우리는 마구 떠 밀려가다 익사하고 있는 건 아닌가?
아름다운 사랑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인가? 견우와 직녀는 너무나 자연스레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 텐데.
너무나 긴 기간의 금욕이 우리를 사랑의 불구자로 만들었다. 다시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관능적인 사랑의 범람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사랑을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는 인간을 믿어야 한다. 누구나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아름다운 사람을 할 수 있다.
수만 년 동안 아름답게 사랑을 나눴던 우리 조상님들의 뜨거운 피가 우리에게도 흐르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