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나는 가르친다- 약하게 하는 모든 것, 우리의 생을 고갈시키는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을.
나는 가르친다- 강하게 하는 것, 힘을 비축하는 것, 힘의 감정을 시인하는 모든 것에 대한 긍정을.
- 니체, <힘에의 의지>
고향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야외에 나갔다가 고향의 산천 비슷한 곳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왜 나의 가슴에는 고향에 대한 이리도 절절한 감정이 있을까? 하지만 막상 고향에 가면, 고향은 없다.
먹먹한 나의 가슴만 있을 뿐이다. 자전거를 타고 고향 구석구석을 누비며 울먹이다 온다.
이상향을 유토피아라고 한다. 유토피아(Utopia)는 어원으로 보면, ‘없는(u) 땅(topia)’이다.
고향은 힘든 이 세상을 도피하고 싶은 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이상향인 것이다. 인간은 상상력을 가진 동물이라,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힘들 때 일시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은 좋으나, 힘들 때마다 상상의 세계로 도망가 버리게 되면 우리의 정신력은 점차 약해진다.
상상의 세계 없이는 살 수 없게 된다. 땅에 발을 딛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허망하다. ‘우리의 생을 고갈시키는’ 삶이다.
우리가 고향을 생각할 때 좋은 기분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고향이 정말 좋아서가 아니라 물입해서 그렇다.
고향을 생각하게 되면, 우리의 정신은 부모님의 품 안에서 자라던 마냥 즐거운 어린 아이가 된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어른으로 살아야 한다. 인류의 스승으로 불리는 소크라테스는 사형 선고를 받고도 다음과 같이 의연하게 변론을 한다.
“죽음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저승으로 가는 여행길과 같은 것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르페우스와 무사이오스와 헤시오도스와 호머와 함께 모일 수 있다면, 여러분 가운데는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할지라도 서슴지 않고 나서려는 분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몇 번을 죽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그곳에서 지내는 것이 그야말로 좋은 것일 테니까요.”
소크라테스는 한평생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진선미(眞善美)를 아는 타고나는 본성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이 본성의 명령에 따르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이 진선미를 아는 본성의 빛을 다른 사람에게 향한다.
그래서 누구나 다른 사람은 정확하게 본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본성의 빛을 거의 비추지 않기에 자신은 잘 모른다.
소크라테스 같은 성인들은 항상 이 본성의 빛을 자신에게 비추기에 자신을 명확히 알고, 자신(소우주)을 훤히 알기에 남도 알고 이 세상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진짜 고향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은 죽으면 육체에 갇혀 있던 의식이 해방되어 완전한 ‘순수 의식’이 된다.
순수 의식은 동양에서 말하는 기(氣),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장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 순수 의식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기에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실제의 세계와 만난다.
이 세계에서는 과거의 모든 존재들을 다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세계에서는 찰나가 영원이니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과거의 뛰어난 시인들, 오르페우스와 무사이오스와 헤시오도스와 호머와 함께 모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20세기 천재과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비춰보면 지극히 과학적인 생각이다.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시간은 각자 있는 곳에 따라 다르게 흐르기에, 우리는 서로의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육체를 가진 물질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물질은 허상이고 실제로 기(氣, 에너지장)의 존재다.
그래서 소크라테스 같이 높은 의식을 지닌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의연하다. 죽음은 허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질인 육체에 집착하는 의식으로 보면, 태어난 곳이 고향이지만 물질을 넘어서는 의식으로 보면, 실질적인 고향은 무한한 에너지장이다.
고매한 정신의 천상병 시인에게도 죽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귀천)이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는 지상에 소풍 온 아이였다. 가슴 속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어른들은 허망한 삶을 견딜 수 없어, 온갖 환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시인은 그럴 필요가 없다. 삶은 늘 살아있음의 환희이니까. 막걸리 한 잔에 천국, 극락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