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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를 위하여

by 고석근

악마를 위하여


획기적인 삶의 전환점을 마련하려면 우리는 악을 우리가 가진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할만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 니체, <선악의 피안>



한평생 학문연구에 매진했던 파우스트 박사는 지식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허무감에 절망하여 자살하려고 한다.


괴테는 ‘파우스트’라는 근대의 전형적인 지식인을 통해 인간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려 했다.


이때 파우스트는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 속에서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마주하게 된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다. 악(惡)은 원래의 마음, 본성(本性)이 부족해진 상태다. 버금(亞)가는 마음(心)인 것이다.


본성에 버금가는, 첫 번째의 본성에 미치지 못하는 두 번째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우리가 빛을 추구할 때 생겨난다.


지식이라는 빛을 한평생 연구한 파우스트의 마음에는 그만큼 커다란 어두운 그림자가 생겨나는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섬뜩한 그림자를 마주하고서 경악할 때, 그의 그림자가 그에게 속삭인다. “나는 악마이지만, 결국에는 선을 이룩하는 힘의 일부입니다.”


니체는 말한다. “획기적인 삶의 전환점을 마련하려면 우리는 악을 우리가 가진 최선의 것이라고 생각할만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파우스트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 악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동안 지식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선은 본성만이 행할 수 있다. 본성을 잃은 마음으로는 선을 행할 수가 없다. 예수가 말했듯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다.


몸은 본성이 충만한 마음으로 태어난다. 그런데 우리가 자아의 욕심에 빠져 본성을 잃어가게 되면, 육신이 약해진다.


선을 행할 수 없는 몸이 된다. 그래서 공부는 학습(學習),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배움이 몸에 깊이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악마의 유혹에 빠진 파우스트는 쾌락에 빠져들게 된다. 그는 쾌락 속에서 서서히 사랑을 깨달아간다.


니체는 “육신의 쾌락이 승화된 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온전한 마음은 선과 악이 통합된 마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릴 적부터 착하게 살아가라고 배우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빛을 찾아간다.


뒤에 어두운 그림자가 생겨난다. 그림자는 빛 속에 있을 때는 항상 따라 다닌다. 어둠 속에 들어가서야 사라진다.


우리는 깊은 어둠 속에서 죄의식으로 신음한다. 이 죄의식이 우리의 삶을 지려멸렬하게 한다.


그래서 원시인들은 악마의 탈을 쓰고 격렬하게 춤을 추었다. 잠시 악마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원시인들은 악의 마음, 그림자를 통합하여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적 장치가 없는 현대문명사회에서는 멀쩡하던 인간이 한순간에 악마가 될 수 있다.


깊은 내면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악마가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지킬 박사가 한순간에 하이드가 되는 것이다. 하이드(hide)는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 숨긴 나다.


우리가 이 세상을 진정으로 선하게 살아가려면 먼저 영혼부터 악마에게 팔아야 한다.


이러한 삶이 니체가 말하는 ‘위험하게 살아가기’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말한다. “그대 앞에 길이 훤히 보인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길일 것이다.”


우리 앞은 빛이 사라진 캄캄한 어둠의 세계여야 한다. 이때 내면에서 마음의 눈이 깨어난다.


온 몸이 눈이 되어 길을 찾아갈 것이다. 파우스트는 어둠 속에서 빛(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외치게 된다. “시간이여 멈추어라! 참 아름답구나!” 그는 찰나에서 영원을 발견했던 것이다.

사랑을 발견해야 인간은 구원이 된다. 이 사랑은 빛과 어둠이 하나인 온전한 마음만이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수많은 파우스트들이 살아가고 있다. 아비규환의 세상으로 보이지만, 실은 구원의 행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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