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사람은 어떻게 해서 본래의 자기가 되는가- 사람이 본래의 자기가 된다는 것은 자기가 본래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 의식의 모든 표면을 어떤 하나의 큰 명령에 물들지 않게끔 깨끗하게 해 두어야 한다. 거창한 모든 말과 몸짓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
- 니체, <즐거운 지식>
나는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명상을 한다. 가볍게 몸을 풀어 준 후 누워서 명상에 들어간다.
잘 될 때는 ‘텅 빈 나’가 된다. 충만하다. 깨어나 시계를 보면, 한 시간이 후딱 흘러갔다.
그 시간이 우리의 실재다. 물질인 육체가 기(氣, 에너지)로 존재할 때다. 참 좋다. 부족함이 없는 나다.
하지만 명상에서 깨어나면, 나의 ‘자아(自我, ego)’도 함께 깨어난다. 자아는 우리 의식의 중심이다.
명상 상태에서는 니체가 말하는 본래의 ‘자기(自己, self)’가 된다. 이 자기는 천지자연 그 자체다.
삶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이다. 인도의 신 시바의 춤이다. 오래 전에 이 명상 상태를 즐기지 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 아비규환의 인간세상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자아인 나’로 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석가는 출가를 하여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공부를 했다. 선정은 본래의 자기를 만나는 공부다.
석가는 회의했다. ‘선정에서 깨어나면, 다시 욕심에 집착하는 내가 되지 않는가?’ 그는 교단을 떠나 혼자 정진하다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석가는 한 그루 나무가 된 것이다. 나무는 땅에 깊이 뿌리를 박고 하늘을 향해 줄기와 가지를 뻗으며 살아간다.
이때 석가가 깨달은 것이 ‘중도(中道)’다. 중(中)의 길이다. 중은 양극을 포함하는 마음을 말한다.
우리는 항상 양극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
이 마음으로 살아가면, 불행해진다. 내면에서 두 마음이 항상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중의 마음은 이 둘을 포함하는 하나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본성(本性), 본래의 마음이다.
본성은 천지자연과 하나여서 천지자연의 이치를 다 안다. 석가는 이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선정에 들어간 마음을 평상시에도 유지만 하면 된다. 어떻게? 집착하지 않으면 된다.
자신의 마음을 그냥 두면 본성이 알아서 우리를 잘 살아가게 한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께서 역사하신다”고 말한다.
노자는 이것을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고 말한다. ‘하는 것이 없으면서 하지 않음이 없다’
석가는 우리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이 실체가 없음을 보았다. 이것을 불교의 경전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하다. 만약 모든 형상과 형상 아닌 것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우리는 삼라만상이 눈에 분명히 보이니까 그것들이 실체라고 착각한다. 실체라고 믿기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 집착하게 된다.
이 집착만 끊으면, 우리의 마음이 본성이 된다. 즉 여래(如來), 부처가 된다. 여래는 오고 가는 자연 그 자체를 말한다.
이 집착을 끊는 것을 니체는 “의식의 모든 표면을 어떤 하나의 큰 명령에 물들지 않게끔 깨끗하게 해 두어야 한다. 거창한 모든 말과 몸짓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큰 명령에 따라 살아간다. 워낙 거창한 말과 몸짓으로 명령을 하니, 무조건 복종하게 된다.
이러한 삶은 자신의 삶이 아니라 노예의 삶이다. 우리는 노예에서 벗나나기 위해, 큰 명령에 압도당하지 말아야 한다.
항상 자신의 본성을 믿어야 한다. 이 본성으로 큰 명령을 비춰봐야 한다. 고요히 큰 명령들을 들여다보면, 본성이 그 명령을 따라야 할지 거부해야 할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모든 성현들의 가르침이 이것이다. 쉼 없이 자신의 본성을 들여다 볼 것, 본성의 명령을 들으며 살아갈 것.
이러한 삶은 공자가 말하는 ‘중용(中庸)의 삶’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이 충만한 삶’이고,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삶’이다.
요즘 유행하는 알아차림 명상은 본성을 잃지 않기 위한 마음공부 방법이다. 항상 마음을 몸에 붙어 있게 하는 것이다.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행위에 마음을 집중하고, 걸어 갈 때는 걷는 행위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화가 날 때는 화가 난 마음을 무심히 바라보는 것이다. 무심히 바라볼 때, 우리 안의 본성이 깨어난다.
몸은 천지자연과 하나다. 마음도 몸 그 자체인데, 자아의 욕심에 빠지다 보면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몸에 붙어 있나 항상 확인하는 것이 알아차림 명상법이다. 이 명상법으로 살아가면 우리는 멋지게 한 세상을 살다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