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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by 고석근

나는 누구인가


서정 시인의 형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즉, 자신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객관화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나’, 즉 자아는 잠시 깨어있을 때의 경험적인 실재의 자아와는 다르다. 이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유일한 자아이며, 이 자아의 모상을 통하여 서정적인 천재는 사물의 근저까지도 통찰하는 것이다.


- <비극의 탄생>



나이가 들어가며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성현들은 ‘삶과 죽음이 하나’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다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조선 시대의 고승 서산대사는 그런 멋진 사람들 중의 한 명일 것이다. 그는 나이 80이 넘어 죽음을 앞두고 영정 뒷면에 시를 적어 넣었다.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그리고는 앉은 채로 죽었다고 한다.


80년 전의 아기, 그 아기는 80년 후의 모습이 될 씨앗이다. 아주 작은 씨앗에 활짝 핀 꽃이 이미 들어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미래가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는 것이다. 천지자연의 운행의 이치다. 자신을 다 피운 꽃 한 송이를 바라보듯, 서산대사는 자신의 영정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자신을 활짝 꽃 피운 나무 한 그루는 미련 없이 자신에게서 떠날 수 있었다.

또 다시 무언가로 피어날 것이다. 겉으로는 태어나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 같지만, 우리 안에는 니체가 말하는 ‘진실로 존재하는 유일한 자아’가 있다.


우리 안의 불멸의 ‘신성(神性)’이다. 우주의 실상은 에너지장이다. 영원한 율동이다. 이 율동이 물질로 드러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이 물질이 삼라만상이다. 이러한 천지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서산대사는 천지자연의 운행 그 자체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서산대사의 일생 전체가 이렇게 깔끔했을까?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난다.


서산대사는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진흙탕 속에서 발버둥을 쳤을까? 하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 안의 ‘진실로 존재하는 유일한 자아’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니체는 서정 시인들이 노래하는 것은 이 ‘참나(眞我)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서정 시인들은 ‘사물의 근저까지도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참나(self)는 천지자연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황지우 시인은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변신하는 ‘진실로 존재하는 유일한 자아’를 노래한다.


‘온몸이 으스러지면서/으스러지면서 부르터지면서/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아아 마침내, 끝끝내/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꽃 피는 나무이다’


심층심리학자 칼 융은 “인생의 목적은 자기실현(自己實現)”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씨앗을 활짝 꽃 피우는 게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 긴 여정에서 우리는 ‘온몸이 으스러지면서/으스러지면서 부르터지면서’ 살아간다.


지나고 보면, 우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이 자기실현의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흐트러져 살았다고 생각하는 시간들도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되기 위한 방황이었던 것이다.


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죽을 때는 자신이 활짝 핀 큰 꽃이 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평소에 우리가 자신을 비하하고 멸시하는 것은 자신이 큰 꽃을 피우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장자는 하늘을 높이 날아가는 대붕과 지상에서 포르릉 포르릉 날아다니며 살아가는 참새를 차별하지 않는다.

차별이 없는데, 스스로 자신을 차별하는 게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자신의 생각을 살펴봐야 한다.

자신 안의 ‘자아(ego)’와 ‘참된 자아(self)’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고 생각하는 자신은 자아다.


자아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맡은 역할들이다. 남성, 여성, 부모, 직장인... 연극의 배역 같은 것들이다.

역할이 끝나면 무대를 내려와야 한다. 하지만 ‘참된 자아(self)’는 영원한 생명이다. 천지자연 그 자체다.


우리는 겨울나무처럼, 항상 ‘봄 나무’를 품고 살아가야 한다. 스스로를 죽이며 봄 나무로 새로이 태어나야 한다.


서산대사가 멋지게 한 세상을 살다갈 수 있었던 것은, 일찍이 자신 안의 ‘진실로 존재하는 유일한 자아’를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홀연히 본고향을 깨달아 얻으니/모든 것이 다만 이렇고 이렇도다.’ 그는 ‘본고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세상에서 ‘이렇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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